르네상스 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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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 | 등록일 | 13.04.17 | 조회수 | 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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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정신 『도시국가가 또다시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다.』 '르네상스'라는 말의 기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에 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옛 문명과 새 문명 사이에 해당하는 시대에 이루어진 것에 관해서는 철저히 경멸했다. 그들은 그 1천 년의 기간을 중세라고 간단히 명명하고, 인간의 정신이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시대로 규정했다. 이 중간 시대가 끝나자 리나스키멘토(rinascimento)1), 즉 '인간 정신의 부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대략 200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여명기를 느낀다. 그러나 정신의 부활은 지갑의 부활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경우가 많다. 중세 초기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쪼그라들었던 지갑은 차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돈은 인간의 정신에 묘한 영향을 준다. 이제는 돈 이외에 조그만 종잇조각도 있었다. 신용이라는 수수께끼의 새로운 발명과 관련된 종이였다. 인간의 신용을 보증하는 그 종잇조각은 금화보다 더 강력했다. 그때까지 정신적·세속적 지배자들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독립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유의 분위기는 팽배했으나, 튼튼한 성벽을 두른 도시의 내부만큼 인간의 마음에 자부심과 독립심을 채워주는 곳은 달리 없었다. 르네상스의 원인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르네상스는 상업이 (화폐와 신용을 통해) 중세 초기의 물물교환 방식에 승리한 결과로 탄생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부차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중산층이 급속히 번영하지 않았다면(그에 따라 정치·사회적 세력이 증대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를 확고히 지배하게 되자 중산층은 보따리장수의 처지에서 정식 상인으로 발돋움했던 과거의 일을 잊고 싶어 했다. 그들은 동료 시민들을 위해 병원과 교회를 지었는데, 이는 배우려는 욕망, 참된 학문에 대한 존중, 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부 매우 훌륭하고 진심 어린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경제적으로 종속된 사람에게는 미를 사랑하거나 학문을 존중하는 미덕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다. 가난한 사람은 미술관과 보석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미를 사랑하고 학문을 존경하는 중산층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해야 했다. 13~14세기는 중산층이 그 권력을 향유한 시대였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르네상스의 물결은 북이탈리아에서 발원해 플랑드르로 넘어갔다. 이 두 지역은 지중해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은 반면 정치적으로는 독일, 프랑스, 교황령 등 열강의 완충지대에 해당했기에 르네상스를 꽃피울 수 있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유는 새로운 번영의 물결이 처음으로 밀어닥친 곳이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 번영은 다양한 무역로를 따라 유럽 각지로 퍼졌다. 번영의 징후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건축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었다. 꽃의 경우에는 이파리가 몇 장이고 수술이 어떤 모양인지 관찰하고 특정한 규칙에 따라 정의하거나 분류할 수 있지만, 르네상스 건축 양식은 그런 정의가 불가능하다. 건축은 인간의 정신이 그대로 표현된 예술 형식이며, 나무와 매우 비슷한 데가 있다. 나무는 어떤 풍경에서도 가장 독특한 요소이지만, 나무를 다른 풍경에 옮겨 심으면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실력 있는 정원사가 정성껏 돌보지 않으면 옮겨심기 전의 나무와 크게 달라진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수십 개의 나라가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 양식의 건축을 채택했다고 하자. 처음에는 똑같은 일반 원칙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설계를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건축 과정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 예기치 못한 결과가 발생하기 일쑤다. 미국 포토맥 강변의 그리스식 신전을 예로 들어보자. 그리스의 원래 신전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그리스가 배경이라면 웅장하게 보이겠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이탈리아인이 거의 본능적으로 고딕 양식을 멀리하게 되었을 때 아마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논리적인 추론의 결과는 아니다. 왜 낯선 풍토의 산물을 그렇게 혐오하는지 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은 직관을 통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논리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따지고 계산해도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낯익은 배경이 형성되자, 즉 과거의 조상들처럼 또다시 시민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의 건축 방식이야말로 이탈리아의 사회적 필요성과 풍토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1천 년 전의 고전 양식으로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고딕 양식은 이류로 떨어졌으며, 이탈리아는 또다시 서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카이사르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시대를 선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발전 과정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도시는 피렌체다. 여기에는 중세 초반 내내 끊이지 않았던 내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새의 형태를 갖춰야 했던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많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초기만 해도 잠자리에서 살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부자들은 감옥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저택은 롱아일랜드의 별장보다 조폐국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외벽은 강도와 산적을 막아야 하므로 여느 때처럼 견고했고 창문도 비교적 작았다. 그러나 안쪽에는 널찍한 안뜰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늘어섰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에스파냐식 저택 같은 일종의 파티오(patio)2)다. 폼페이 발굴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고대 로마의 가옥과 비슷하다. 1천 년 전처럼 벽에도 그림들이 가득했고 그림들도 고대 로마의 그림과 비슷했다. 농부들은 밭을 갈다 고대 조각상을 발견하면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1천 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있던 문명은 사람들의 안목이 달라진 순간 갑자기 소생했다. 당시 고대 유물은 대부분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이탈리아의 기후는 이집트와 달리 땅에 묻힌 것이 영원히 보존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비누칠을 하고 물과 사포로 잘 닦으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지 알고 싶으면 고대 유물을 전시한 이탈리아의 대형 박물관에 가보라. 2, 3일이면 질려서 두 손을 들 것이다. 또 이탈리아의 수많은 마을과 촌락, 개인 저택에도 유물들을 소장한 지역 박물관이 하나씩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18세기에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집을 베르사유 궁전의 축소판처럼 만들려는 생각에서 이탈리아 예술품을 수레가 아니라 배로 사들였다. 칼라브리아와 움브리아의 시골 땅에 있던 유물들이 모두 작센이나 네바 강변3)으로 옮겨졌다. 최근 고미술품 수출금지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로코코적 품위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그랜드 투어(Grand Tour)4)를 떠난 젊은이들은 저마다 로마 황제나 그리스 여신의 두상과 토르소를 기념품으로 챙겨와 요크셔, 베름란드, 암스텔벤의 아버지 별장에 장식물로 가져다놓았다. 이런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로마가 4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대가로 얼마나 약탈을 당했는지, 르네상스 초기에 발굴된 유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단연 최고였다. 폐허의 상태에서도 로마는 빛났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마는 고대부터 변함없이 서양 문명의 중심지라는 지위를 유지했다. 이제 전 세계의 '근대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또다시 로마가 지시하는 새로운 건축 양식에 따라 주택과 사무실을 건축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형편없는 구식으로 낙인찍힐 판이었다. 그 새 양식은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마치 오늘날 고딕 양식이나 앤 여왕 시대5)의 양식이 대학을 설립한 자선가들 사이에서 유행의 초점이 된 것과 같다. 이후 2세기 동안 새 양식은 유럽 대륙의 구석까지 파고들어갔다. 새 양식의 확산을 촉진하고 부추긴 사람들은 예술의 영역에 새로 들어온 직업 건축가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자주 '건축가'라는 말을 썼지만 실은 모든 건축물을 건축가가 짓는다는 관념에 익숙한 독자를 고려한 것일 뿐이다. 중세에는 현대적 의미의 건축가가 없었다. '건축가(architect)'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지만 그리스에도 건축가는 없었다. '아르키텍토르(architektor)'라는 그리스어는 단지 건축 십장이라는 의미였다. 타고난 재능과 실용적 기술을 결합해 인부들을 지휘하고, 현장에서 응용할 수 있는 수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동료들보다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점차 승진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대성당을 건축할 때 총감독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남들보다 급료는 더 많이 받았지만 사회적 지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석수, 슬레이트공, 땜장이(복잡한 고딕 성당의 지붕에는 납 세공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유리장이, 목수, 칠장이와 같은 신분이었다. 십장이나 인부나 모두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십장의 명령에 따른 이유는 그가 어느 벽돌공보다도 빨리 벽돌을 쌓았고, 위험한 지붕에 올라가 페인트를 칠해야 할 때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비계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라가는 시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건축 실무에 관해 그는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건축가는 이제 십장이 아니라 예술가였다. 건축 과정에 그가 실제로 투여하는 근육노동이라고는 고작 연필을 깎는 정도였다. 이런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건축의 발전 과정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예술은 무의식적이고 자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어딘가 유아적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에는 달라졌다. 건축가가 짓고 있는 건물은 전능한 신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였지만 이제 신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완벽한 고전의 양식을 구현하기 위한 규칙과 통제"였다. 그 규칙과 통제는 위대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십서』에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시대에 로마의 모든 민간과 군용 건물의 총감독이었던 비트루비우스는 거의 1500년 동안이나 잊혔다가 스위스의 장크트갈렌 수도원에서 그의 책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 미국인들은 중간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검은색 아니면 흰색을 좋아한다. 회색은 인기가 없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예술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듣고 독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요. 그런데 당신의 생각은 뭐요? 좋다는 거요, 나쁘다는 거요?" 대답은 다른 모든 건축, 음악, 회화 양식의 경우와 같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위대한 거장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브라만테(Bramante)나 미켈란젤로, 프랑스의 쥘 아르두앵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와 자크 가브리엘(Jacques Gabriel, 이들은 베르사유의 파사드와 파리 콩코르드 광장을 건축했다.), 에스파냐의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Juan Bautista de Toledo,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건축가), 런던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세인트폴 대성당의 건축가), 네덜란드의 야코프 반 캄펜(Jacob van Kampen, 옛 암스테르담 시청의 건축가) 등의 손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은 적절하고 만족스러운 표현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건축물들은 미적인 결함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했다는 결함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비트루비우스의 원칙을 충실히 따라야 했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프티트리아농 궁전에서 보듯이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방 한구석에 작은 화로 하나만 갖다놓아도 겨울의 냉기를 쫓을 수 있었으므로 지붕이 평평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북유럽의 겨울은 매우 춥고 4~5개월이나 지속되므로 벽난로와 굴뚝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파리를 생각하면 맨 먼저 줄줄이 늘어선 굴뚝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굴뚝들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지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네덜란드와 런던에서는 굴뚝이 뾰족 지붕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나흘이나 비가 오는 나라에서는 뾰족 지붕이 필수적이다. 비트루비우스의 시대에는 북유럽이 개척되지 않은 황야였으므로 평평한 지붕이 어울렸지만, 빈의 힐데브란트(Hildebrandt)와 피셔 폰 에를라흐(Fischer von Erlach), 드레스덴의 푀펠만(Pöppelmann) 같은 건축가들은 비트루비우스가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에 궁정 도서관과 츠빙거 궁전의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했다. 장식도 문제였다. 누구나 잘 아는 파리의 개선문을 예로 들어보자. 기원후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로마에 개선문을 세운 이후 전 세계에 수많은 개선문들이 세워졌다. 그런데 개선문을 보면 건축가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기념물 하나에 주인공의 모든 활약상을 표현하려 하면 불필요한 장면들이 많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병사들이 칼과 창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어떤 병사는 탄탄한 가슴에 십여 개나 되는 적의 창을 맞고 장렬히 죽는다. 말이 날뛰고 악대가 나팔을 분다. 특별한 사건은 원형 돋을새김으로 특별히 기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여백은 나중에 꽃과 종려나무 이파리로 적절히 장식한다. 장식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개선문을 세우는 참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데 있다. "대단한 인물이군! 존경할 만한 위인이야!" 그렇게 처리하면 예술적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그 위대한 장군이나 정치가의 후손들은 건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대리석을 통해 조상의 생애를 널리 알리는 것뿐이었다. 제정 시대 로마의 많은 건물과 기념비들을 희화화시킨 그 욕심이 또다시 새로운 양식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이후 수백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 새로운 양식은 르네상스 양식의 직계 후손이고, 늘 르네상스 양식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약간 수정되고 변형되었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그것이 바로 바로크 양식이다. 원래 에스파냐어로 바로코(barroco)란 커다란 진주라는 뜻이다. 값은 비싸지만 형태가 불규칙하고 균형이 맞지 않은 탓에 아름답다기보다는 괴상한 모습이다. 17세기에 바로크라는 명칭이 붙은 궁전과 교회는 기본적으로 위대한 고전 거장들의 건축 원칙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환경의 영향으로 과장된 요소가 추가된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는 뭔가 들뜨고 통속적인 분위기, 오늘날로 치면 할리우드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바로크와 할리우드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 둘 다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번쩍거리는 치장과 불필요하고 값비싼 장식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며, 극히 사소한 것에 엄청난 돈을 들이는 그 낭비 앞에서 유쾌한 경외감을 느낀다. 이런 유사성에는 이유가 있다. 17세기의 교회와 20세기의 영화 산업은 같은 숙제를 안고 있었다. 세력을 떨치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야 했다. 사람들은 투입된 돈의 양으로 사물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할리우드는 대량생산된 상품에 쏟아부은 막대한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교회는 신교라는 거대한 이단의 위험에 직면한 유럽 세계를 정신적으로 지배해야 했다. 16세기 초에 교회가 맞닥뜨린 위기는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독일의 어느 반항적인 수사가 로마 당국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그 전까지 잘 통하던 자비로운 설득과 무자비한 폭력을 조합한 처방이 이번에는 듣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권의 통일이라는 중세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세계의 한 부분을 영원히 잃은 듯했고,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수상했다. 교회는 이런 상황을 돌려놓아야 했다. 종교재판과 고문, 사형 집행인의 도끼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의지할 것은 예술밖에 없었다. 예술을 무기로 삼아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위한 이 거대한 투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건축, 음악,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옛 어머니 교회의 아름다움과 힘과 매력과 영광을 각인시켜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대단히 소박한 르네상스 양식을 완벽하게 다듬고 변형시켜 무수한 형식과 형태로 만들어냈다. 그 최종 결과는 교정이 불가능한 고집스러운 이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감동을 주어야 했다. 가엾은 이단자들은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들은 다른 방면에서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종교개혁에 이은 끝없는 종교전쟁은 중세 후기부터 서로 경쟁하던 몇 개 왕국들에게 간절히 고대하던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작은 살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토를 더 확장하고 싶었다. 이제 드디어 한몫 잡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려면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먼저 옛 봉건 귀족과 반(半)독립적 도시 국가들의 힘을 무너뜨려야 했고, 게다가 세계제국 옛 로마의 이념과도 싸워야 했다. 로마의 이념은 세계제국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신이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듯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권위의 중심이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공을 위해서는 먼저 왕국의 이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팔아야 했다. 리슐리외(Richelieu)나 마자랭(Mazarin)처럼 교회와 정치를 모두 지배한 저명한 역사적 인물들과 관련된 일을 '판다'고 말하면 다소 품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이 말을 칭찬으로 들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현실적인 사업가였고 정치의 이념에 관해 아무런 환상도 갖지 않았다. 그들은 후안무치한 방식으로 국민에게 국왕을 팔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홍보 같은 술책은 경멸하면서 쓰지 않았다. 개인적인 적들은 군대, 첩자, 뇌물, 지하감옥으로 처리할 수 있었으나, 국민 전체를 휘어잡으려면 교회처럼 더 교묘한 방법을 써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와 똑같이 예술가들을 징발해 앞장세우고 비용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건축가, 화가, 음악가에게 "비용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반가운 말은 없다. 사람들에게 공짜 구경거리를 제공해 땀 흘려 세금을 낸 대가로 뭔가 얻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면 왕국의 영광을 위해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을 잊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목적에서 유럽 각국의 수도마다 베르사유를 모방한 궁전이 세워졌다. 17세기 후반의 유럽에는 수도가 300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하라. 모두 같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클라우젠부르크-존더스하우젠-딩켈슈필의 하인리히 35세는 영토가 퐁바두르 부인의 애인인 샤를 왕의 사유지보다 작았지만, 전 인구가 8734명에 불과한 수도 플라우멘슈타트를 태양왕의 수도와 같은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희생까지 불사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그 사정을 잘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독립전쟁기에 가난한 헤센 사람들은 불과 총액 1600만 달러에 영국의 용병으로 팔려 미국에 왔다. 그러나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헤센의 지배자는 카셀의 자기 궁전을 18세기의 명소로 만드는 데 그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그 궁전을 보고 감탄을 보내려면, 토성에서 벌어진 전쟁만큼이나 자신들과 무관한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가엾은 용병들의 유골 위에 그 아름다운 대리석 홀과 수영장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예술의 한 측면이므로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는 편이 좋다. 자칫하면 충격적인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역사책에 나오듯이, 종교개혁을 촉발한 여러 가지 불만 중의 하나는 푸거 은행 가문7)이 산더미처럼 쌓인 면죄부를 처분하기 위해 대대적인 강매운동을 벌인 탓에 발생한 심원한 분노였다. 면죄부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미 11세기의 1차 십자군 시절부터 팔리고 있었다. 그런데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새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이 성당은 4세기 초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초대 교황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운 옛 건물을 대체할 예정이었다. 옛 건물은 심하게 낡아 보수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반세기 전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피렌체의 건축가 로셀리노(Rossellino)에게 새 성당을 설계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는 벽이 세워지기 전에 죽었고, 그 뒤 50년 동안 교황청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낸 탓에 건축이 중단되었다. 면죄부로 지은 성당 서쪽에서 바라본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여러 차례 건축가가 바뀌다가 미켈란젤로가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돔 지붕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1590년에 완성했다. 율리우스 2세는 교회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웅장한 바티칸 박물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교황이다. 그는 거장 브라만테를 불러 로셀리노의 옛 설계를 시대에 맞게 수정하라고 명했다. 도나토 다우뇰로(Donato d'Augnolo)는 라파엘로와 같은 우르비노 태생이었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도제 생활을 마치고 이름을 브라만테로 바꾸었다. 그 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그를 로마 교황청 건축의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데르에 이어 1503년에 교황이 된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에게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재개하고 최대한 서둘러 완공하라고 명했다. 브라만테는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자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모르타르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황이 은행가에게 문의한 결과 교황청은 현재 파산 상태였다. 현대의 건축가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일이다. 현재 미국에도 건물이 저당 잡힌 교회가 많다. 보르자 가문(알렉산데르 6세를 배출한 에스파냐계의 명가) 이후로 교황의 신용은 바닥이 났다. 결국 교황은 면죄부를 대량으로 팔아 자금을 조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교회의 역사상 가장 기묘한 판매회사가 출범했다. 독일인들은 복종에 익숙해 저항할 위험성이 가장 적다고 예상되었으므로 모든 노력을 독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유명한 푸거 은행 가문(이들이 탈러(Thaler), 즉 달러(dollar)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이 독일 전역의 면죄부 판매권을 따냈다. 푸거 은행은 테첼(Tetzel)이라는 도미니쿠스 수사를 발탁해 면죄부 판매 계획을 수립했다. 테첼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먼 곳까지 다니면서 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중혼(重婚)의 죄를 지은 비교적 가벼운 죄인은 6길더, 살인자는 8길더, 신성모독을 범한 자는 9길더 등 죄의 성격에 따라 면죄부의 가격은 달랐으며, 이미 저지른 죄는 물론 장차 저지르게 될 죄까지도 면죄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공포심과 고지식함을 악용한 그 파렴치한 행위는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의 주요 원인이다. 그러나 로마는 그 종교적 반란의 참된 성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또다시 라이벌 관계의 두 교단이 이해관계 때문에 볼썽사납게 다투는 것으로 인식했다. 심지어 로마는 북유럽의 대도시들이 보낸 경고의 편지를 읽으려 하지도 않았다. 테첼 수사가 노력한 덕분에 금화가 쌓이자 드디어 브라만테는 그리스도교권에서 가장 큰 성당의 건축에 착수할 수 있었다. 브라만테는 중앙 돔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튼튼한 기둥의 건설을 감독했으나 그 기둥들을 연결할 아치를 건설할 무렵에 죽었다. 그의 수석 조수 두 사람은 노인이었으므로 적어도 100년은 걸릴 공사를 굳이 서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리는 화가 라파엘로에게 건축을 맡겼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6년 이상 격무에 시달리다 1520년에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평범한 건축가들이 공사를 맡았으나 으레 그렇듯이 저마다 취향이 달라 일하기보다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교황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를 발탁해 모든 일을 일임했다. 그는 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다 틀렸다면서 성당을 라틴 십자가형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 상갈로는 그 계획을 소화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공사는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결국 미켈란젤로 이외에는 수석 건축가의 지위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미켈란젤로도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방해하면 누구든 해임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547년이었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대성당 건축을 결심하고 로셀리노의 예비 설계에 동의한 지 무려 한 세기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미켈란젤로에 관해서는 별도의 장에서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아주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그는 30년 전에 죽은 브라만테의 원래 설계를 채택하고 여기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특히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박공과 열주가 딸린 넓은 현관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대형 돔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중앙 기둥을 강화한 다음 돔을 완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름 42미터, 높이 13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돔이었다. 그밖에 이 성당과 관련된 모든 것은 미켈란젤로다운 규모를 자랑했다. 중세 초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성 소피아 사원은 넓이가 6898평방미터였다.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은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의 절반밖에 안 되며, 쾰른 대성당은 6137평방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죽을 때까지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건물 내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때는 반세기 뒤인 1606년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종교개혁은 교회를 거의 파멸의 위기로 몰았다. 교회는 방황하는 신교도들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고지식한 설계는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한다고 볼 수 없었다. 당시 교황은 파울루스 5세였다. 그가 속한 보르게세 가문은 몇 세기 전 시에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출발해 로마 최고의 미술품 컬렉션을 가지게 되었다. 이 컬렉션은 이후 약간 묘한 운명을 겪게 된다. 19세기 초에 보르게세 가문의 카밀로는 나폴레옹의 아름다운 누이 폴린 보나파르트와 결혼한 뒤 그 컬렉션을 나폴레옹에게 팔았다. 그 뒤 프랑스에 보관되었던 컬렉션은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으로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갔다. 지금 로마에 가보면 로마 외곽에 위치한 아름다운 보르게세 저택에서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조성한 멋진 정원과 함께 그 컬렉션을 관람할 수 있다. 현재 그 저택과 컬렉션은 국유로 되어 있다. 이제 파울루스 5세에게로 돌아가자. '근대적' 교황이었던 그가 보기에는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바로크풍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100년 전의 라틴 십자가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회중석을 아주 길게 하고, 특별한 능력도 없이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면서 미켈란젤로의 현관 전체에 새로 바로크식 파사드를 붙였다. 오늘날 보듯이 그것은 착각이었다. 돔이 건물을 지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돔은 파사드와 생소하고 잡다해 보이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들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사람들은 이런 건물을 좋아한 모양이지만 지금 우리는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소박함을 한층 더 친밀하게 여기므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중의 열망에 영합한 것을 보면 감동하기보다 화가 날 정도다. 다행히 그 불쾌한 효과는 반원형의 긴 주랑으로 다소 완화된다. 이 주랑은 성베드로 대성당의 마지막 건축을 맡은 나폴리 출신의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가 건물이 완공된 지 몇 년 뒤에 덧붙였는데, 갈릴리 호수의 어부였던 베드로의 묘에 예배하러 온 군중을 맞이하기 위해 두 팔을 뻗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1626년 11월 18일, 그러니까 최초의 성베드로 바실리카가 창건된 지 1300년째 되는 날에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이 성당을 공식으로 봉헌했다. 하지만 교황이 속한 피렌체의 명망가 바르베리니(Barberini) 가문은 고대 로마의 유적에서 유물들을 마구 탈취해 자신들의 저택을 장식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당시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unt Barberini"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야만인들이 다 파괴하지 못한 것을 바르베리니 가문이 파괴했다"는 뜻이다. 내가 그리스도교권의 자존심인 대성당 가운데 적어도 한 곳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이야기는 과거의 대형 건축 사업을 잘 보여주는 표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정해진 유파나 시대에 따라 예술을 분류하려 할 때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성베드로 대성당에는 4세기의 원래 바실리카에 속하는 부분도 있고, 12세기에 만들어진 제단도 있다. 로마가 서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시절에 로마의 기술자가 조각한 석관이 있는가 하면, 르네상스 초기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의 작품도 있다. 바로크풍이 격렬히 분출된 탓에 예전의 인상이 사라진 측면도 있으며, 거꾸로 사람들이 오랜 종교분쟁에 넌더리를 내고 더 합리적인 삶의 철학으로 돌아간 결과로 18세기 로코코풍의 유쾌한 효과가 가미되기도 했다. 건축, 음악, 회화에서 하나의 양식은 반드시 특정한 세대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나타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전진하는 게 아니라 되는대로 불규칙하게 전진하므로 언제나 소수의 용감한 선구자들이 앞장서고 맨 뒤에 낙오자들이 따른다. 이 두 집단 사이에 위치한 보통 사람들은 방향이 확실하고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으면 어느 길로 가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점을 깨닫기 어렵다. 전투에 한창 참여하고 있는 병사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속한 작은 영역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100년 뒤의 사람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변화와 역변화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그 전투는 바로 우리가 생각하던 방식대로 전개되었다." 이런 말도 가능하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 예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전모를 총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술을 창조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우리 자신이 후대 사람들에게 혹독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 하지 말고 신중하게 연구하고 비교해야 한다. 그런 방식은 너무 복잡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다란 장점이 있다. 선택의 폭이 무척 넓어지므로 자신의 특별한 예술적 취향에 꼭 맞는 것을 찾아내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을 때는 반드시 관용과 이해의 두터운 외투를 입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실망이라는 감기에 걸릴 수 있다. 과거의 예술을 진정으로 즐기고 싶다면 그 감기는 절대로 피해야 할 대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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