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와 식해 매일신문 2010-07-01
중년 이상의 연배라면 한여름에도 방에 불을 피우고 아랫목을 뜨끈뜨끈하게 덥힌 뒤 밥과 엿기름을 밀봉한 항아리를 이불로 덮어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감주라고도 부르는 식혜(食醯)를 만들기 위해서다.
지금이야 보온밥통에 예닐곱시간 두면 될 일이지만 예전에는 50~60℃에서 밥알을 삭히기 위해 그런 땀 나는 과정이 필요했다.
명절 후식이나 무더위 때 갈증을 달래는 음료로 예부터 즐겨 먹던 식혜는 정성의 산물이었다. 재료가 간단하고 만들기도 쉽지만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제맛이 났다.
식혜는 멥쌀이나 찹쌀로 밥을 되게 지어서 엿기름 물에 풀어서 따뜻하게 두면 밥알이 삭으면서 독특한 향과 맛을 낸다. 밥알이 많을수록 단맛이 나고 색이 하얗지만 맛을 내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엿기름이다.
엿기름을 우려내 윗물만 따라 써야 하는데 앙금이 들어가면 밥알이 거무스름해진다. 요즘 캔에 포장해 파는 식혜 가운데 누렇거나 거무스름한 것은 엿기름의 품질 때문이다.
엿기름은 식혜뿐만 아니라 엿, 고추장, 떡, 술 등에 두루 쓰임새가 많아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정성들여 우려냈다. 1924년에 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엿기름은 가을 보리가 제일이니 이삼월이나 구시월에 싹을 내어 볕에 말려 가루를 만들어 쓴다.
비단 엿 고는 것뿐 아니라 식혜도 하고 고추장에도 넣고 약에도 많이 쓴다’고 나온 걸 보면 20세기 초까지도 엿기름을 직접 고는 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예향 안동에서 즐겨 먹는 안동식혜는 식혜 중에서도 맛이 독특하고,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찹쌀을 찌고 잘게 썬 무와 생강을 엿기름 내린 물에 섞어 버무린 뒤 고춧물을 들이고 오지 항아리에 담아 아랫목에서 하룻밤 재운다.
밥알과 다른 건더기가 벌겋게 삭으면 밥알에서 나온 단맛과 고춧가루의 매운 맛이 어울려 맵싸하면서도 시원한 기분이 든다. 멀건 김치국물에 밥알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아 처음 먹기에는 잘 내키지 않지만 맛은 일품이다.
안동식혜는 식해에서 식혜로 갈라지는 과정에서 나온 형태로 보는 이가 많다. 식해(食 )란 간단히 말해 생선을 발효시킨 음식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고루 분포한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해를 즐겼는데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시를 보면 연잎에 식해를 싸서 먹었다거나 차와 식해를 바꿔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북송 때 시인 소동파는 필화사건으로 옥살이를 할 때 사식으로 들어온 식해를 보고 시를 지어 사면받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자미나 북어, 도루묵 등 덜 비린 생선을 약간 말려 소금에 절이고 밥과 엿기름을 섞은 다음 고추, 마늘 등과 함께 단지에 넣어 삭혀 반찬으로 먹었다. 갈치나 명태, 조기로 만든 진주 식해나 조갯살로 만든 황해도 연안 식해 등이 유명했다.
그러고 보면 식해에서 고기와 채소 등을 빼고 밥과 엿기름만으로 만든 것이 식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여름 휴가를 안동식혜와 진주식해, 식혜를 함께 맛보는 코스로 잡아보면 전통음식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흥미로운 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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