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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전
작성자 우태환 등록일 16.12.23 조회수 1029

줄거리: 인현왕후는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채 서른의 나이로 승하하자 계비로 간택되었다. 자질이 총명하고 후덕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후사를 염려한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간언하여 궁녀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희빈 장씨는 곧 태기가 있어 왕자를 낳았는데 이후 숙종의 총애를 믿고 인현왕후가 아이를 죽이려 한다는 등 갖은 말을 지어내 인현왕후를 핍박하였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폐비되기에 이르렀지만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숙종에 의해 복위되었다.

인현왕후의 복위에 심사가 뒤틀린 장씨는 주술을 통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희빈 장씨의 이름은 장옥정으로 아버지는 장형이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장씨는 오빠 장희재와 함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뒤에는 역관으로 큰 재산을 모아 거부로 소문난 장현이 있었는데 장씨는 장현의 종질녀였다. 장씨가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장현 덕택이었을 것이다.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장씨는 궁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숙종의 눈에 들게 되었다.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은 1680(숙종6)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장씨는 외모와 달리 성격은 그리 호감을 주는 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장씨가 숙종의 총애까지 받게 되자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는데, 특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장씨의 사람됨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며 그녀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겨 급기야 장씨를 집으로 쫓아 버리기에 이르렀다.한편,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인현왕후 민씨가 중전의 지위에 올랐다. 민씨는 당시 최고의 가문이었던 여흥 민씨 민유중(1630~1687)의 딸로, 장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체가 높았다. 인현왕후는 임금의 총애를 입은 궁인을 오랫동안 물리칠 수 없다하여 장씨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명성왕후에게 간청하였는데, 명성왕후의 완강한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씨는 1683년에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복귀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인현왕후는 자기가 불러들인 장씨가 후일 자신의 운명을 나락 끝으로 밀어 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여인의 운명은 이때부터 엇갈리기 시작하였다. 인현왕후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궁에 들어온 장씨는 숙종의 총애를 믿고 다시 교만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엔가는 숙종이 그녀에게 장난을 걸자 인현왕후의 처소에 뛰어들어 제발 나를 살려 주십시오하며 인현왕후의 기색을 살핀 일도 있었는데, 이후로는 인현왕후가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공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인현왕후는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도록 명을 내린 일도 있었다. 인현왕후도 점차 장씨에게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안감은 아이가 생기지 않자 더욱 가중되었다. 첫째 왕비 인경왕후가 두 명의 공주를 출산하고 세상을 떠난 터라, 인현왕후는 반드시 왕자를 낳아야 할 입장이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숙종은 그런 그녀를 점점 멀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장씨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숙종의 총애가 더욱 집중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인현왕후는 어진 후궁을 뽑아 자손을 보도록 숙종에게 간청하였다.

느낀점: 이걸 보고 느낀 점은 권력에 욕심 부리지 말고 권력으로 인해 우리 나라가 점점 살기 힘든 나라라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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