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을 읽고 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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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정미진 | 등록일 | 05.12.02 | 조회수 | 342 |
처음에는 어느 추운 겨울 저녁, 한소녀가 숲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집 개가 덫에 치여서 발버둥치면서 울부짓고 있었다. 한 소녀가 개에게 가다가 같이 가던 목사가 \"안돼, 플로렌스! 가까이 가면 안돼\"라고 말했다. 한소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었다. 플로렌스가 개 앞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더욱 무섭게 울부짓었고 덫에 치인 다리에서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플로렌스가 개를 보고 \'아냐, 이대로 놔두면 죽을 수도 있어. 내가 물리더라도 살려야돼\'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위험을 무릎쓰고 덫을 풀어주었다. 목사가 뒤뚱거리며 달려왔을 때 이미 피가 많이 나는 개의 다리를 손수건으로 꽁꽁 처매 준 뒤였다. 이 소녀가 뒷날, 전쟁터에서 숱한 무상병들을 살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었다. 플로렌스가 태어나기 전에 파니와 월리엄(웬) 나이팅게일 부부가 1919년에 결혼했다. 먼저 언니 퍼시가 태어나고 그 다음 둘째로 딸이 태어났다. 사람들을 플로렌스는 플로 퍼세노피는 퍼시 또는 폽이라고 불렀다.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플로는 언제나 언니 퍼시가 자기 뜻에 따르기를 바랐다. 어머니 파니도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랐지만, 둘이 그렇게 못했다. 이 무렵, 아버지 웬은 정치에 참여했다가 선거에 지고 말았다. 이 일로 해서 아버지는 정치라는 것에 깊이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어머니 파니는 정적과 그늘의 생활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의 자기의 생활 양식과 인생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남편으로부터 딸들에게 옮겼다. 그리하여 새 집을 짓기로 했다. 어느날 플로랜스가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그녀에게 신비로운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하늘의 자녀로 일하라\'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겼다. 플로렌스는 스스로 \"비밀 메모\'라고 부르는 메모를 적는 습관이 있었다. 1837년 2월 7일, 하느님께선 따르라고, 말하라고 말씀했다. 그로부터 40년쯤 뒤인 1874년 쓴 \'비밀메모\'에는 \'지금까지 네번 그 소리는 나에게 말했다\'고 적혀있었다. 나이팅게일 가족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플로렌스의 인생에 있어서의 최초의 커다란 갈등이 되어버렸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일이라는 것이 굳게 믿기까지 방황하고 고민한 세월과 이어서 가족과 크게 충돌하면서 플로렌스가 실제로 환자를 간호할 수 있게 되기까지 16년간 플로렌스가 자신과의 싸울도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플로렌스의 갈등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플로렌스가 사교계의 꽃이 되기를 바랐다. 플로렌스가 사촌언니를 좋아하는데 사촌언니는 플로렌스를 몹시 싫어했다. 1844년, 하우 박사 부부의 방문을 받고 큰 영향을 받았다. 1849년, 귀국하는 길에 독일의 카이제르스베르트 병원을 방문했다. 이 곳을 방문한 것이 훈련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1주일동안 머물렀다. 8월13일, 플로렌스가 이제 무슨일이 있어도 두번 다시 고민하지 않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이곳을 떠났다. 그러나 1851년, 플로렌스가 다시 이곳에 와서 일하기로 했다. 3개월동안 간호를 배우면서 살았다. 나중에 1852년때 런던 자선 병원 원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이 일어나서 38명의 간호사와 수녀님을 데리고 위스퀴다르로 건너가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오랫동안 부상병들을 위해 치료해서 몸이 점점 쇠약하게 되었지만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1855년, 크림 전선을 시찰하던 중 열병에 걸렸다.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편지와 하사품을 받았다. 그녀의 마음은 병사들을 받아들이고 사람함으로써 충족되었다. 병사들을 앓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건강해진 뒤에서도 돌봐주여야 한다는 것을 플로렌스가 차춥 깨달았다. 1856년, 크림전쟁이 끝난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에 유명하게 된 플로렌스가 1960년 때 기금으로 간호사 학교 개설을 했다. 끝까지 환자를 돌보는 플로렌스가 기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1883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로열 적심자상을 받았고 1887년에도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에릿 훈장을 받았다. 50년동안 봉사를 끝난 다음, 플로렌스가 기능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효하게 생각해 온 인간을 단련하는 점이 무시된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 1880년 2월2일, 어머니 파니가 돌아가셨고, 1890년때도 언니 퍼시도 세상을 떠났다. 그후에 플로렌스가 1896년 뒤로는 사우스 거리를 한번도 떠나지 않고 남은 인생을 그 곳의 침실에서 보내면서 세월을 흘렸다. 몇 년후에 나이가 너무 먹어서 세상을 떠났다. 90년 3개월동안 살아온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기억하면서 동상을 세웠다.
-느낀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팅게을을 존경해왔다. 지금까지 책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고, 나이팅게일은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 병든 환자들을 돌본다는 것이 정말 위대했다. 만약에 나이팅게일이 지금까지 살아계시면 한번 뵙을 수 있는데, 벌써 과거에 세상을 떠났다니 정말 아쉬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나이들어서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나이팅게일을 만날 수 있는거 같다고 생각을 들었다^^ 나는 나이팅게일처럼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남에게 돌봐주는것이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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