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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9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80주년]그날의 폭탄을 아시나요?
작성자 김은정 등록일 12.04.25 조회수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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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는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자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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