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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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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자랑스런 인물
작성자 임은영 등록일 12.11.07 조회수 453

◎ 유자명

▸인물 구분 : 독립운동가

▸시대 : 일제시대

▸출생지 : 충주

▸업적 : 동방피압박민족엽합회 조직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하이 지부 조직

농학박사

중국 원예학회 명예 이사장

 

1891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근이다. 본명은 유흥식이지만, 의열단 참모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학생시위를 계획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베이징을 중심으로 이회영·김창숙·신채호 등과 함께 활약했는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한때 입원학교 교장을 지냈고,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들과 교유하며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이런 교분을 이용하여 한국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한국인 장교를 양성하는 일을 도왔다.

1927년 김규식·이광제 및 중국인 무광루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엽합회를 조직하였다. 협회의 한국 책임자가 되어 기관지〈동방민족〉을 발송하고 비밀지부를 설치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하였다. 또, 1931년에는 중국인 이석증·노신 등과 협력하여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하이 지부를 조직하여 그 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된 활동목표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의 고위직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작업에 있었다. 1936년에는 항일전의 제1선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5차 개헌에 앞서 7인 헌법기초위원을 맡아 일하였다. 그는 이때를 제외하고는 표면에 나서 활동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일제의 수괴급을 암살하거나 일본의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작전의 배후 참모로서의 역할만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려고 자유중국까지 왔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 교수생활을 하면서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 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년에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저서로는 자서전《한 혁명자의 회고록》이 있으며 1982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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