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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변호사의 제대로 공부법
작성자 양재숙 등록일 12.07.06 조회수 366
“넌 왜 꿈이 없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청소년을 타박하는 부모의 목소리. 그러나 정작 그런 힐난에서 ‘꿈’이 의미하는 바를 들여다보면, 갖고 싶은 ‘직업’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직업이 다양해진 시기는 수만년의 인류 역사 중 불과 몇백년에 불과하다. 한국에선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떤 직업에 강하게 끌리는 유전자 같은 건 우리 안에 없다. 그러니 도대체 “어떤 직업이 좋냐”고 다그친다고 해서 나올 리가 없다. 쉽게 대답이 나온다면? 그건 그 직업의 외양, 즉 소득, 안정성, 사회적 지위, 뭔가 멋있는 듯한 이미지를 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건 꿈이 아니라 ‘위신에 대한 욕구’다. 말의 원래 의미를 크게 벗어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꿈이라는 말의 이러한 오용은 우리 사회의 ‘공부에 대한 오해’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사회적 위신을 갖춘 직업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준비 활동을 ‘공부’라고 부른다. 책만 찾아보면 금방 답을 알 수 있는 ‘퀴즈’들을 책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낼 준비를 하는 건 가치 있는 활동으로 취급한다.

통합 교과라고 하면서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지역을 새까맣게 표시해놓고, “이 지역에 노비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저기 영국 지도에 색칠해놓은 저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라고 묻는다. 그래놓고 세계사와 역사를 통합시켰다고 한다.

이 질문이 왜 중요한가? 무언가를 잘하려면 그 활동의 목적과 구조를 알아야 한다. 문을 열려면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를 사용해서 열어야 한다. 1년 안에 턱걸이를 20개 해낼 수 있기 위해 맨날 오래 매달리기만 한다고 생각해보라. 물론 쓰이는 근육은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턱걸이 실력은 크게 늘지 않는다.

공부가 턱걸이라면, 시험 준비 활동은 오래 매달리기다. 공부의 요소를 일부 갖고 있기는 하다. 시험을 통해 검사되는 지식들 중 일부는 계속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익히려면 단계별로 배우면서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공부의 전부로 보는 것이 큰 문제다. 시험은 공부를 왜곡시킨다. 공부의 목적은 시험성적을 잘 받는 일로 왜곡된다. 공부의 방법은, 집단적·획일적으로 부과되는 진도의 속도를 얼마나 잘 따라오느냐로 왜곡된다.

왜곡된 것을 본연의 것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책과 같은 자료에 있는 지식을 학생의 두뇌로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동년배의 다른 이들보다 그 복사해서 붙이는 속도가 떨어지거나 복사율이 낮으면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연의 공부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교육에서 이보다 더 큰 해악이 있을까.

당연히 그 반동으로 반대쪽에 있는 극단의 오해도 생겨났다. ‘구조화되지 않은 체험’을 공부 자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착각에 따르면 규칙을 습득하기 위해 주의 깊게 짜인 적절한 ‘반복훈련’은 필요가 없다. 그냥 이리저리 여러 가지 해보면 되고 문제가 던져지면 혼자 무정형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답이 나온다. 그러나 ‘삶의 모든 것이 곧 공부’라는 말은 통찰력을 주는 수사(rhetoric)는 될 수 있어도 공부의 정확한 정의(定議)는 될 수 없다. 그런 식으로만 생각할 경우, 각자 “정답은 없고 의견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며 지식을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공부는 시험 준비도, 단순한 체험도 아니다. 우리는 공부를 ‘문제 해결 활동’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한 변호사, <이것이 공부다>·<너의 의무를 묻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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