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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던 길 멈춰 서서(고 장영희 교수)
작성자 주형식 등록일 14.09.23 조회수 326

 

   서울대 고 장왕록 교수님의 딸인, 서강대 고 장영희 교수의 글을 읽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사단법인 세계직지문화협회에서 주관하는 <1인1책 펴내기>사업에 원고를 내면서 부제로서 '문득, 가던 길 멈추고'를 달았는데 바로 이 글을 읽고 얻은 생각이었습니다.

 

가던 길 멈춰 서서

 

 

장영희(전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어느 상가를 지나는데 아주 화려하고 예쁜 잠옷이 걸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고가품 같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여자가 손님이 입으실 거예요?’ 하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호기심에 값만 물어본 것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여자는 대답 대신 밑에서 내복 한 벌을 꺼내 앞으로 툭 던지며 재고 남은 건데 만이천원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장애인이니 가난해서 고가의 잠옷은 엄두도 못 낼 거고, 목발까지 짚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몸에 예쁜 잠옷이 가당찮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 나름대로의 배려와 친절이었을 테지만, 난 적이 불쾌했다.

 

   꽤 오래 전 유학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에 잠깐 귀국해 있는 동안 동생과 명품을 많이 판다는 패션가를 지날 일이 있었다. 난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옷가게 쇼윈도에 걸린 옷을 보더니 동생이 기필코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구에 턱이 너무 높아 동생만 들어가고 나는 문 밖에 서 있었다.

 

   주인 여자는 착의실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다가 문득 문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대번에 낯색이 변하더니 동전 없어요, 나중에 오세요하는 것이었다.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못 알아듣고 눈만 껌벅이고 서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더욱 표독스럽게 영업 방해하지 말고 나중에 오라는데 안 들려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동생이 옷을 반만 걸치고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뭐예요! 우리 언니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예요?” 난 그제서야 주인여자가 날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 장애는 곧 가난과 고립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그것도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거리에서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것만 해도 뭣한데 결정적으로 목발까지 짚고 서 있었으니 거지가 될 필요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거지라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걸인시인으로 알려진 영국시인 W H 데이비스(1871~1940)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조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열세 살 때 친구들과 도둑질을 하다 체포된 후 퇴학을 당하고 액자공장에서 도금 기술을 배우지만, 그 일을 혐오해서 몰래 책을 읽다가 들키기 일쑤였다. 조모가 죽자 그는 고향을 떠나 일정한 직업 없이 걸식을 하면서 방랑한다. (후에 그는 이때의 생활을 문학을 하고 싶은 야망으로 저주받지 않았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거지로 남았을 것이라며 걸인 생활에 대한 향수를 토로한다)

 

   그러나 28세 되던 해 그는 금맥이 터졌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으로 가서 서부로 가는 화물기차에 뛰어오르다가 떨어져서 무릎 위까지 절단한 장애인이 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외다리로는 걸인생활을 하기 힘들어지자 시인이 되기로 작정, 서너 편의 시를 종이 한 장에 인쇄해 집집마다 다니며 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비로 출판한 영혼의 파괴자 외()’를 계기로 그는 특이한 삶을 산 방랑걸인 시인으로 서서히 관심을 끌기 시작하고,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의 대표작 가던 길 멈춰 서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고 예쁜 잠옷 안 입으면 어떠랴. 온 세상이 풍비박산 나는 듯 시끄러운데 강물에 몸을 던질 만큼 괴로운 일이나 내 몸에 불지를 만큼 악에 바칠 일도 없이,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이 작은 여유는 크나큰 축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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