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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엔딩인터뷰①]이상훈선수와의 인터뷰- 침묵 속의 야구, 충추성심고교 박상수감독
작성자 서문은경 등록일 09.09.21 조회수 916
2009년 8월 19일- 일간스포츠 네버엔딩인터뷰에 이상훈선수와 인터뷰한 내용
 
[네버엔딩인터뷰①] 침묵 속의 야구, 충추성심고교 박상수감독
 

오랜만에 박상수를 만났다. 지금은 헐린 동대문야구장에서 '서울고 투수 이상훈'과 군산상고 '외야수 박상수'로 처음 만났던 사이다. 그때 우리는 묘하게도 뜻이 통했다. 서로 닮은 데가 많아서였던 것 같다.

그 박상수는 지금 야구팀 감독이다. 충주성심학교 야구부 감독. 성심학교는 청각장애를 안고 있는 농아인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상수는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지만 프로팀 1차 지명까지 받았던 좋은 선수였다.

상수에게 듣고 잠시나마 직접 본 성심학교의 야구는 내가 아는 야구와는 다르다. 관중의 함성과 타격음, 주심의 스크라이크콜이 없는 '침묵의 야구'다. 그래도 야구는 똑같다. 미국 야구도, 일본 야구도, 한국 야구도 똑같은 야구이듯 성심학교의 야구도 같은 야구다. 그라운드엔 공통의 야구 규칙이 적용된다.

 
-오랜만이야. 예전에 사업할 때 보고 처음이지.

“그렇지.”

-성심학교 야구부엔 언제부터 몸담았어?

“쌍방울에 있던 이연수 선배 소개로 들어왔지. 2002년 9월에 들어왔으니 이제 7년째인가. 사실 인터뷰가 망설여졌어. 성심학교가 있어야 내가 있는 건데, 내가 돋보이게 되면 곤란해.”

-2~3년도 아니고 7년 동안 했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꼭 듣고 싶었어. 나도 가족 중에 농아인이 한 분 계시거든. 그들에게 야구를 가르친다는 게 쉽진 않을 거야.

“처음엔 힘들었지. 우리 사회가 슬픈 게, 장애인일수록 결손 가정 출신이 많아. 야구 감독 뿐 아니라 형 노릇, 아버지 노릇까지 해야 해. 하지만 야구는 똑같은 야구야.”


▲공부하며 야구한다

-학교에 야구부가 만들어진 이유는 뭐야.


“야구부를 처음 만드신 분이 한국농아인야구협회 부회장인 조일연 선생님이야. 그 분 말씀이 우리 학생들에겐 뚜렷한 목표가 없다는 거야.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1년에 대학 진학생이 1~2명이야. 나머지는 대개 단순 노동직에 취업해. 일반인에겐 어려운 소음이 심한 현장 일이 많지. 후배들은 ‘전교 1등 하던 선배도 저런 일을 한다’고 생각해. 공부를 할 동기를 찾지 못하는 거지. 그 분은 야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시더군. 아이들이 야구를 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늘었어. 야구부 졸업생들이 직장에서도 일을 잘 해. 일을 그만 둔 친구도 있어.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격증이나 대학 입시 공부를 하기 위해서야. 예전엔 졸업하면 학생들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지, 지금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동호회 만들어 사회인 야구를 해.”

-다른 종목도 많은데 왜 야구였을까.

“우선, 개인 종목보다 단체 종목을 하자고 했어. 역할과 책임감을 배우는 거지. 사실 농아인들은 축구를 좋아해. 하지만 정확한 포메이션에 맞춰 경기를 하는 건 쉽지 않지. 야구는 위치가 정해져 있고, 볼데드 시간이 길어. 또 시추에이션 게임이니 반복 훈련으로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익히면 돼. 농아인에겐 야구가 맞는 것 같아. 또 일반인보다 더 나은 점도 있어.”

-그래?

“보상 감각이라는 게 있어. 어느 한 감각이 나쁘면 다른 감각이 좋아지는 거야. 우리 선수들은 눈이 좋아. 선구안도 좋고 한 번 본 타격 자세나 투구 폼을 금방 따라 해. 물론 한계는 있지. 플라이 타구 때 콜 플레이가 안 돼 한 두 점을 줘 진 경기가 많아.”

-훈련 시스템은 일반 학교에 비해 어때?

“거의 비슷하지. 오히려 나은 점도 있어. 여기엔 남학생 대다수가 야구를 해. 운동과 공부를 겸한다는 점에선 일반 학교보다 낫지. 다른 학교에선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잖아. 여건은 어렵지만 선수들 장비나 유니폼은 학교에서 지원해주고.”

-기합은 있나?

“체벌은 안 해. 대신 러닝을 시키지. 반성 겸 체력 단력으로.”

-훈련 시간은?

“우리 학생들은 오후 시간에 기술 수업을 받아. 수업이 끝나면 밤까지 다섯 시간 훈련해. 방학 때는 오전과 오후 훈련만 하고.”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나?

“중·고등부 학생이 75명인데 그 중 절반은 여학생이야. 남학생 가운데 20여 명이 야구를 하니 70% 가량이지. 자기가 원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이나 학부모가 권유해.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 보다 야구를 하는 게 훨씬 건강하잖아.”

-농아 야구팀은 몇 개가 있니?

“서울농아학교에서도 야구를 하는데 거긴 연식 야구지. 농아 야구가 활발한 일본도 연식이지. 농아 팀이 일반 고교 대회에 출전하는 건 세계적으로 드물거야.”

-선수로 뛰고 있는 졸업생이 있나?

“송호대학교 2학년에 투수가 한 명 있어. 그 친군 지금 4년제 대학 편입을 준비 중이지.”
[네버엔딩인터뷰②] ‘농아인들에게 야구는 청심환’
사진 설명은 본문내용 참조

-더미 호이?

“메이저리그 초창기에 뛰었던 농아인 선수지. 통산 2000안타를 쳤어. 주심의 스트라이크·볼 사인이 그 선수 때문에 나왔다고 해. 듣지 못하는 호이를 위해 심판들이 몸동작을 하게 됐지. 그러니까 야구는 처음에는 일반인과 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경기였던 셈이지. 우리 프로야구에서도 농아인 선수가 한 이닝이라도 던지면 그게 바로 역사야. 프로야구는 대중 스포츠잖아. 소외 계층도 어우러지는 야구가 되야지. ”

-2002년부터 지금까지 몇 번 이겼니.

“연습 경기에선 두 번 이겼지. 정식 경기에선 9회까지 간 경기가 딱 한 번 있었어. 5회까지 5-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6회부터 선수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어. 결국 9-6으로 졌어. 자멸이었지. 우리 선수들은 늘 5회 콜드 게임, 잘해야 7회 콜드 게임으로 졌으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그 경기야. 2003년 처음으로 봉황대기에 출전했을 때도 기억에 남아. 다들 1루도 못 밟을 거라고 했어. 득점에 성공했던 순간을 아직 잊을 수 없어.”

-대회에 나가면 ‘다른 팀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소외감도 느낄텐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겠지. 하지만 우리 팀에는 우리만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 물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핸디캡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팀에 몇 점을 더 주는 게 아니잖아. 일반인과 동등하게 경쟁한다는 게 우리 선수들에겐 큰 경험이야.”

-그래도 야구하는 방법이 다를 거 아냐.

“수비 때 2루에서 상대 주자와 승부가 되더라도 3루로 공을 던지라고 하지. 공이 빠져 버리면 주자가 홈까지 들어올 수 있거든. 청각 도움없이 눈에만 의존하는 플레이를 해야 하니 실수가 많아. 그래서 우리 수비는 방어적인 수비야.”

-야구장에선 이기는 게 목표지?

“그렇지. 난 우리 선수들이 농아인이라 안 된다는 생각엔 동의하지 않아. 우리 애들은 다만 늦게 시작했을 뿐이야. 요즘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하는 선수들도 있어. 고3이라면 11년 경험이 쌓인 거지. 반면 우리 팀엔 고1 때 시작하는 선수가 많아. 출발이 늦었을 뿐이지. 지금은 이기진 못해도 비슷비슷하게는 가. 발전하는 게 눈에 보여.”

-솔직히 수준이 어때?

“고교 대회에 출전하지만 실력은 중2~중3 정도? 올해는 봉황대기에 출전하지 못했어. 좋은 선수들이 많이 졸업했거든. 대신 중3 선수들을 집중해서 가르치지. 얘들이 내년 우리 팀의 주축이 될 거야. 다만 졸업한 애들은 운동 선수 기질이 있었는데 지금 애들은 얌전한 편이라 조금 걱정은 돼. 하지만 2002년보단 나아. 그땐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야 했거든. 지금은 선배가 후배를 가르쳐. 그게 훨씬 빨라.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농아인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거든.”

-사인은 어떻게 내니.

“초창기 어느 경기 중에 오른손으로 왼팔을 치면서 도루 사인을 냈어. 그러니 주자가 도루 사인 맞냐고 몸짓으로 물어 봐. 그럼 다른 팀에서 눈치를 채잖아. 그래서 한동안은 색깔로 사인을 정했지. 지금은 어느정도 구색을 맞췄어. 단 바꾸긴 어려워. 창단 이후 사인 시스템은 딱 하나 뿐이야. 이러니 애로 사항이 생기더군.”

-뭔데.

“농아인 야구 대회가 따로 있거든. 사회인 팀으로 나오는 선수들이 다 여기 졸업생이야. 그러니 그 녀석들은 사인 다 알고 야구하는 거지.”

-대회가 있구나.

“아직 장애인 체전 정식 종목은 아직 아냐. 지난해에는 서울에서 아시아농아야구대회를 했어. 잠실에서 하루, 목동에서 하루.”

[네버엔딩인터뷰③] “수비연습때, 감독이 훈련량 제일 많아”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듣지 못하는 선수들과 처음 호흡을 맞추긴 쉽지 않았을 텐데.


“4~5년은 도를 닦았지. 우리 선수 때야 감독이 뭐라 하면 바짝 군기가 들잖아. 그런데 여기에선 선수들 운동장에 한 번 부르는 데도 시간이 걸려. 3년 전인가? 운동 끝나고 씻으려는 데 수건이 없어. 옆 방에 가보니 애들이 감독 수건으로 방을 닦고 있더군. 감독을 우습게 여겨서가 아니라 권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거지. 그래도 애들에게 내 별명 뭐냐고 물어보니 종이에 호랑이 그림을 그리더라.”

-엄격한 편인가?

“글쎄. 처음에는 선수들이 ‘나는 일반인과 다르니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오후 3시에 버스로 출발해 훈련장으로 간다고 하면 3시에 나와. 그럼 난 혼자 운전해서 가 버렸어. 운동 선수에겐 ‘5분 일찍’이 철칙이잖아. 처음엔 그런 것부터 가르쳤어. 지금은 아이들이 10분 일찍 와(웃음).”

-선수들과 의사 소통이 어렵지 않나? 난 그런 경험이 있어. 일반인 세 명과 농아인 한 명이 있는 자리였어. 세 명은 다 함께 이야기를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농아인은 자기를 따돌린다고 화를 냈지.

수화는 기본적으로 단답형이야. ‘검소하게 살라’고 하잖아? 그러면 애들은 ‘검은 소’로 알아들을 때가 있어. 말과 수화를 함께 해야 하는데 처음엔 말이나 수화 하나만 나와. 하나만 하면 오해가 생기기 쉬워. 그러니 의사소통하는 데 에너지가 두 배로 들지.”

-수화는 어떻게 배웠어?

“학교 부근에 수화 통역사들이 강습하는 회관이 있어. 처음 부임해 거기서 배웠지. 빨리 적응하려고 애들이랑 숙소에서 두 달 동안 같이 있었어. 우리도 어렸을 때 선생님 보이면 ‘야, 꼰대 온다’고 했잖아. 얘들도 은어로 쓰는 수화가 따로 있어. 쭉 지켜보다 저걸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무릎을 쳤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방법은 비밀이야. 나중에 어떤 녀석이 수화로 내게 욕하다 크게 혼났지.”

-훈련도 쉽지 않았겠어.

“좌익수 쪽으로 펑고를 치려는데 그 녀석이 딴 짓을 해. 소리를 질러도 듣질 못하니 뛰어 가서 한 대 쥐어박아주고 오지. 그러면 이번엔 중견수 녀석이 한눈을 팔고 있어. 또 뛰어가야지. 그러니 펑고 때 내가 운동량이 제일 많아.”

-훈련 때 가장 주의하는 점은?

“외야 수비 훈련이지. 소리를 못 들으니 공을 놓치기 쉽고 맞기도 해. 그래서 감독·코치가 없으면 절대 개인 훈련을 못 하게 해. 스윙할 때 공이 ‘먹힌다’ 싶으면 우리는 손을 놓잖아. 손 감각 뿐 아니라 ‘틱’하고 나는 소리에 반응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무조건 스윙을 해. 그러니 배트가 많이 부러져. 손 감각도 귀와 연결되는 거더라고. ”

-대한체육회 1급지도자 자격증을 땄다며?

“학교에서 배려해 준 거지. 그래서 태릉 선수촌에서 열리는 1년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어. 야구에는 1급지도자가 5명 밖에 없어.”

-다른 꿈은 없니? 이제 아버지가 됐고, 지도자라면 더 높은 수준의 팀을 맡는 꿈이 있을텐데.

“2002년이 내겐 힘든 때였어. 사업도 어려웠고,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도 해쳤지. 성심학교가 지금은 내게 큰 울타리야. 어렸을 땐 감사란 걸 모르고 살았어. 아이가 태어났을 때, 프로에 입단해 계약금을 받았을 때 정도? 여기에선 건강하게 이 자리에 있는 걸로 만족해. 야구 감독을 직업으로 삼고 하는 것도 행복한 거잖아. 상훈아. 난 그렇게 생각이 되더라. 그리고 우리 학교 야구가 특수해. 어떤 분이 후임으로 오든 적응하는 데 2년은 걸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선수들이 2년을 손해보는 거야.”

-기억에 남는 제자는 누구야?

“제일 말 안 들었던 녀석 둘이지. 하나는 대학, 하나는 직장 다녀. 야구부에선 허구헌날 도망다니던 놈들이었지. 한 녀석 말이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그 친군 야구를 잘 했어. 하지만 너무 늦게 시작해 졸업 뒤 선수로 뛸 데가 없었어.

자기는 포기했지만 아들에게는 야구를 시키고 싶대. 자기가 가장 잘 하고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야구니까. 지금 두 녀석 다 후배들 훈련 봐 주겠다고 학교에 와 있어.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30만원 들고 왔더라. 장애인으로 남들에게 받기만 했던 아이들이 남에게 베푸는 모습을 보고 뭉클했지. 저런 애들 없어. 그래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네버엔딩인터뷰④] “우리 선수에게 필요한건 시간”
 
 

▲3년이 너무 짧다

-재정은 어때?


“어렵지. 교직원들이 월급에서 매달 후원금을 걷어 운영해. 여의도 성모병원 직원분들도 도와주시고. 하지만 아직 기업체 후원은 없어. 우린 전지 훈련은 엄두를 못 내. 지금 여름 방학 합숙 중인데 학교 교실에서 이불 깔고 하지. 하지만 아이들에겐 꿈이 필요해. 그래서 내년 미국 대회 출전을 목표로 삼은 거야. 어려워도 뛰어 봐야지. 초창기에 조일연 선생님은 사회인 야구 경기에서 공을 주워 와 연습구로 썼어.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

-예전에 TV에 광고가 나왔던 것 같은데.

“그 광고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봤지. SK가 후원한 MBC 공익 애니메이션 광고였는데 우리 학교로는 전혀 후원금이나 모델료가 없었어. 그 분야에 무지하게도 했고. 그런데 그 광고 나간 뒤로 ‘SK에서 후원하니 넉넉하시겠네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어. 사실 우리 애들이 다들 잘 생겼어. 그래서 후원이 적은가 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은 많지만 지속적인 관심이 절실해.”

-한국야구위원회(KBO)나 대한야구협회 쪽에 후원을 부탁한 적은?

“도와주시려 하는 분들은 많아. 하지만 아마추어 지원금 가운데 장애인을 특정해 주는 돈이 없으니 쉽지 않은 가봐.”

-선수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게 있다면.

"'야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야. 우리 선수들은 남들보다 늦게 야구를 시작해. 고교 3년은 금방 지나가. 졸업 뒤엔 야구를 할 데가 마땅치 않아. 농아인들은 병역 면제야. 조금 늦게 재능이 꽃피는 선수들도 있잖아. 그런 선수들이 뛸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게 너무 가혹해.

선수들에겐 '프로를 목표로 하라'고 강조하지.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기회의 문이 남들보다 훨씬 좁으니.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에 야구할 수 있는 팀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쌍방울에선 어떻게 은퇴한 거였지?

“원광대에서 주로 지명 타자로 뛰었잖아. 프로에 입단했는데 일단 잘 보여야 할 거 아냐. 1년 반 가량 캐치볼도 안한 주제에 무리하다 보니 어깨가 나빠졌어. 김기태 선배랑 같이 재활했는데, 그땐 재활 개념이 없었잖아.

결국 3년째 되던 해에 은퇴를 결심했지. 집에서도 사업을 해 보라고 권유했고. 아파트 건설업 처음 했을 때가 생각난다. 광주에서 현장 소장에게 이상훈이 내 동기라고 하니 안 믿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상훈 데려 올테니 밥 한 번 먹자’고 했지. 그때 기억나나?”

-잊어버렸다, 야.

“네가 정말 광주로 내려왔거든. 그 뒤론 그 현장에선 일이 술술 풀렸지. 그땐 고마웠어.”

정리=최민규 기자 [didofid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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