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
|||||
---|---|---|---|---|---|
작성자 | 이지수 | 등록일 | 15.12.29 | 조회수 | 124 |
첨부파일 | |||||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옥천삼양초 사서교사 이지수
김진송 목수님을 지난 10월, ‘인문나눔축제’ 북콘서트에서 만나 뵈었다. 목수님이라 불러야할지, 작가님이라 불러야할지를 잠시 고민해야 할 정도로 목수님의 이력은 특별했다. 전공은 국문학과 미술사인데 현재 직업은, 목수… 그럼에도 이 셋을 절묘하게 버무려 예술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각각의 작품에 맞는 이야기를 직접 쓰시니, 목수님이 세상의 탁월한 재능이란 재능은 모두 가져가신 듯 했다. 목수님의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난다, 2012)’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도 없는 참신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목수님이 직접 깎고 만드신 작품들에 움직이는 생명력을 더하고, 거기에 제목과 이야기라는 살을 덧붙이셨으니 당연했다. 여기에 목수님이 직접 촬영하고 음악과 이야기를 입힌 동영상을 감상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나의 예술작품과 그 작품에 의미부여를 한 글과 기술과의 만남. 세상 어디에도 없던 특별한 이야기의 탄생이었다. 모두 좋았지만,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은 ‘악몽’, ‘삽새’, ‘개, 의자에게 말하다’였다. 공통적인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삽새의 경우 제목만 보고선 처음엔 욕인가, 하는 단순흥미의 1차원적인 접근으로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삽새는 ‘삽과 새’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가 쓰인 삽새의 이야기를 읽다가 절로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 쇠로 돌아가고 싶었던 투덜이 삽은 주인의 ‘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벅찬 마음을 안고 감격에 겨워 ‘쇠…’를 말하지만, 이를 잘못 알아들은 주인은 ‘새’라 알아듣는다. 결국 삽은 원하던 쇠가 아닌 ‘새’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작품사진에서도 자루가 부러진 채 삽은 새의 몸뚱이가 되어 있고, 앙상한 철근은 새의 양 다리가 되어 있다. 희망이 절망이 된 삽새의 처량한 모습, 삽날이 낡아있는 것 또한 그 참담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듯 보여 구석구석 한참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삽을 새로 만들어버린 반전의 이야기. 이야기는 이렇듯 눈이 보이는 사물이나 보이지 않는 것에나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남편은 늘 내게 ‘의미부여하지 마라’고 한다. 집에 있는 아이들의 낙서, 그림, 처음 쓴 한자, 처음 완성한 퍼즐, 태어난 날 받았던 나무 한 그루. 의미부여를 할수록 챙겨야하고 간직해야 할 것들이 되고 마니, 이는 역설적이게도 의미부여가 된 아이들의 사소한 종이 한 장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다보니 문득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야기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마법의 언어이다. 특별히 의미부여가 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심리적 안정감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공감하는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야기는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 거기에 김진송 목수님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혹은 기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생각의 전환을 하기에 혹은 잊고 살았던 물건에의 ‘의미부여’라는 점에서 좋은 듯하다. 길가에 피는 하찮은 풀 한포기라도 의미부여를 통해 위대한 이야기의 첫 탄생을 알리게 되므로, 바로 지금부터 ‘의미부여’라는 장치를 가지고 나만의 세상이야기에 눈을 떠보는 것은 어떨까.
|
이전글 | 까만 아기 양(2-4 서효연) |
---|---|
다음글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