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용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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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용구 | 등록일 | 12.11.12 | 조회수 | 223 |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석용 선생 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전북 마이산에서 거의하여 ‘호남창의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고,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중 체포되어 사형 순국 하였다.
선생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던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고, 이후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등 12의사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거의 방략을 협의하여 1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 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선생은, ‘의진약속’, ‘의령10조’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군율을 정비하여 군경과 시설물을 공격하고,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 앞장섰으며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을 비롯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끌었다.
1909년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는 수시로 변장대 및 밀정을 투입하고 진압잔적을 전개하였다. 이에 선생은 1909년 음력 3월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그 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하여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고 전의를 가다듬었으며 일본청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2년 겨울에는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하여 테라우치 총독과 을사5적,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등을 계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불행히도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원수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당당히 재판에 임하였으며 1914년 4월 28일(음 4.4),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사형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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