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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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경호 | 등록일 | 15.08.19 | 조회수 | 105 |
내가 이책을 읽은 계기는 정약용에 관심이 많기 따문이다. 이책에는 정약용의 일대기가 나온다. 이책의 내용은 이렇다. 정약용은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4살 부터 천자문을 익혔기 때문에 7살때 시를 짓기도 했다. 어느때는 정약용 아버지의 친구가 정약용에게 시를 짓게 했는데 그 시가 정약용의 아버지 친구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정약용이 벼슬을 얻었을때 서학을 연구하다 다른 신하들의 모함으로 귀양을 갔다. 그래서 1790년 3월 정약용은 충청도 해미로 귀양을 갔다. 하지만 정약용은 열흘만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왜냐하면 정약용이 서학을 연구했지만 천주학을 믿지 않은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원에 성을 지을것을 계획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수원성재라는 책을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그 책에는 성을 쌓는 계획과 방법이 자세히 써있었다.그리고 거중기의 설계되도 만들어 냈다. 정조는 수원성재와 거중기 설계도를 보고 매우 기뻐 했다. 수원성이 만들어지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암행어사를 임명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탐관오리인 서용보를 벼슬에서 쫓겨냈다. 1797년에 정약용은 곡산 부사가되어 백성을 괴롭히는 아전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의학책인 마과회통을 펴냈다. 다시 정약용은 한성으로 돌아와 형조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1801년 2월,다시 다른 신하들에게 모함을 받아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갔다. 그래도 정약용은 백성들을 위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펴냈다. 17년뒤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나고, 흠흠신서를 썼다. 이렇게 정약용이 백성을 위한 마음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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