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자랑스런 인물(박팽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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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임은영 | 등록일 | 12.11.07 | 조회수 | 437 |
◎ 박팽년 ▸인물 구분 : 문신 ▸시대 : 조선 초기 ▸출생지 : 회덕 ▸관련유적 : 박팽년 사우(충주 신리) 박팽년선생유허 (대전기념물제1호)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최항·유성원 ·이개·하위지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 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 문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나 가 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 진하였다. 그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으로 성승·유응부·박정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 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 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 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 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 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 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 당하였다. 그 뒤 사육 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숙종 17년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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