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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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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자랑 스러운 인물(신립)
작성자 임은영 등록일 12.11.07 조회수 353

◎ 신립

▸인물 구분 : 무사

▸시대 : 신라시대

▸출생지 : 대가야(경남 고령)

▸관련유적 : 충주시 칠금동(탄금대)

충주시 호암동(우륵당)

충주 우륵 문화제

 

임진왜란 초 충주 전투의 명장.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초기 충주 전투에서 전사한 패장이다. 역사란 원래 승자 중심의 기록이지만 가끔은 패자의 슬픈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전술 차원에서 또는 국가 전략 및 시대상황의 차원에서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립장군은 충주 전투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기 전에는 화려한 승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22세 때인 15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 등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됐다. 1583년 온성부사가 돼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를 격퇴한 다음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오르는 등 화려한 시절도 있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됐다가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가 돼 빈약한 병력으로 충주의 달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왜군이 예상 외로 물밀듯이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도순변사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왜군을 막게 했다. 그리하여 신립 장군은 4월20일 종사관인 의주 목사 김여물과 함께 도성을 떠나 남하하면서 군사를 모아 8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26일 충주 남쪽의 단월역에 진영을 설치했다. 신립 장군은 조령 방어를 포기하고 단월역으로 돌아가 그곳에 도착해 있던 순변사 이일?죽령 조방장 변기를 만나 다시 한번 적정을 확인한 다음 두 장수를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를 충주성으로 이동시켰다. 27일 밤을 충주성에서 보낸 신립 장군은 평지에서 기병으로 적을 무찌른다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이튿날 이른 아침 전 병력을 탄금대로 이동해 배수진을 쳤다. 기병 1000여 명을 출격시켜 적을 제압한 다음 뒤이어 공격하여 왜군을 단월역 쪽으로 격퇴했다. 왜군은 병력을 증강해 재차 신립군의 전방으로 달려들었다.

신립장군은 끝까지 돌격을 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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