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저병과 코흐원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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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주재석 | 등록일 | 24.12.20 | 조회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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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다섯 번째인 ‘가축이 죽는 역병’ 또는 기원전 700년 무렵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시작하며 서술한 ‘아폴론의 역병’을 탄저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근거가 미약하다. 고대 기록 가운데 탄저병으로 짐작되는 가장 구체적인 서술은 기원전 70~기원전 19년에 살았던 로마의 시인 마로(Publius Vergilius Maro)가 남긴 농경시 정도다.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그곳에서 무서운 역병이 일어나 따뜻한 초가을에 양 떼를 차례로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동물을 죽였다. 그 죽음마저도 쉽지 않았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열이 동물의 핏줄을 타고 퍼져 살을 오그라들게 했다.”
서양의 경우 탄저병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닌 확실한 임상 기록은 1752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보다 무려 300여년이나 앞선 기록이 우리나라에 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 김종서 등이 편찬하기 시작해 문종 원년(1451년)에 완성한 <고려사>를 보면 “충렬왕 5년(1279년) 12월 경상도에서 우역(牛疫)이 돌았는데 병든 소를 잡은 사람이 불에 덴 것처럼 손의 살이 벗겨져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에서 도축자로 탄저병이 전염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 정확히 언제부터 탄저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에 기록된 시기가 심상치 않다. 1259년, 고려 고종은 30년에 걸친 고려-몽골 전쟁을 강화(講和)로 마무리 지으면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자 몽골은 고려 국왕이 직접 찾아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태자(훗날 원종)를 대신 보내는 나름의 묘책으로 응했다. 그런데 태자 일행이 몽골로 가던 중 몽케 칸(Khan·몽골에서 군주를 이르던 말)이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했다. 큰형 몽케가 급사하자,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 칸의 자리를 두고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몽케의 네 아들은 모두 너무 어려서 왕권 다툼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몽케의 세 동생 가운데 나이가 가장 위인 쿠빌라이와 막내 아리크부카가 치열하게 맞섰다. 세간에서는 수도 카라코룸에 있는 아리크부카의 승리를 점쳤다. 그런데 고려 태자는 이런 대세론을 거스르는 판단을 내리고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쿠빌라이는 30년 동안 공격하고도 끝내 정복하지 못한 고려의 태자가 방문하자 이를 하늘이 자신에게 칸의 자리를 허락하는 징표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1260년 고려 제24대 왕위에 오른 원종은 쿠빌라이 칸과의 인맥을 사돈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일련의 사실에 관한 역사적 해석은 역사가에게 맡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은 1279년 탄저병 발병 이전에 원나라 관료와 군대가 고려 땅에 대거 들어왔음을 입증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탄저병은 744년 돌궐 제국을 무너뜨리고 한때 당나라까지 겁박했던 위구르 제국을 840년 멸망의 길로 밀어 넣은 주된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는 몽골 초원에 탄저균이 오래전부터 산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곳에 살던 몽골인이 기마 부대와 함께 수많은 우마를 가지고 고려로 밀려왔다. 그 결과, 환경이 다른 먼 타국에서 한꺼번에 유입된 동물과 토종 가축 사이에 의도치 않은 만남의 장이 펼쳐졌다. 만약 이방 동물에 탄저균이 묻어 왔다면, 이들이 새로운 숙주로 옮아가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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