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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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초강초 | 등록일 | 09.03.07 | 조회수 | 89 |
퇴계 이황은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7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이황의 어릴 적 이름은 서홍이고 아버지는 진사인 이식(李埴)이고 어머니는 박씨입니다.. 이황이
태어나고 7개월 만에 아버지가 40세의 나의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황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체 홀어머니아래서 자랐습니다..
서홍은 6살이 되자 서당을 다니고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도 배웠습니다. 서홍은 서당에는 전부 형들인데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공부에만 열중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서당에 가고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책을 챙겨 서당에 가곤
하였습니다.
특히 서홍은 책읽기를 무척이나 좋아 했습니다.
서홍의 책읽기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12살이 되자 이황은 숙부(叔父작은아버지)인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습니다.
이우는 이황의 아버지인 그의 형 이식과 함께 글읽기를 즐겨 하였습니다. 그는 시문에도 재주가 뛰어난 선비였습니다.
이우는 책읽기를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하였으며, 병석에 누워 있을 때도 항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깊은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우는 어린 조카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쳤으며, 조카를 친자식처럼 여겼습니다.
여러 형제들 가운데서도 이황은 특히 숙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생각이 깊고 행동이 바르고 영특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버지 이우가 이황을 지켜보다 어느 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식으로 ‘논어’를 배우겠다.”
이우는 어린 이황에게 물었습니다. “논어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논어란. 공자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제자들과의 문답과 언행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이황은 논어를 띄고 나서 15살 때에 절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시끄럽게 노는 동안 이황은 단정히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덧 19살이 된 이황은 <<성리 대전>>이며 <주역> 등 동양의 각종 철학 서적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의 책읽기는 단순한 읽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책속에 담겨 있는 깊은 사상을 이치를 파헤쳐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책을 읽느라 끼니를 잊을 정도였습니다. 이황이 이렇게 책에 묻혀 살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 덕택이었습니다.
이황의 집에는 책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이식이 워낙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을 썼기 때문에 본래 학자의 집안이었던 처가로부터 장서를 모두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이식은 살아 생전에 늘 자식들을 앞에 앉혀 놓고 책을 가까이 하도록 훈계하였습니다.
이황은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집안 가풍에 따라 열심히 독서를 했고, 아버지가 남겨준 책을 통해 독서하는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성리대전>>은 성리학을 상세히 풀어 쓴 동양 철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황이 나중에 독보적인 사상 체계를 이룩한 ‘이기설’ 이 태어난 것도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듬해 그가 읽은 <주역>은 동양 철학의 가장 심오한 이치를 서술한 것입니다.
이황의 어머니는 책을 너무 읽다가 몸살이 날까봐 걱정까지 하는 데도 이황은 책속에 빠져있을 뿐이었습니다.
1521년 이황이 21살 때 이해에 허씨를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의 처가는 영주에서 이름난 부자였습니다.
1523년에는 좋은 소식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허씨가 맏아들 이 준을 출생하고 이황은 성균관에 입학 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의 가장 높은 교육 기관으로서, 지금의 국립 대학에 해당합니다.
성균관에 들어온 이황은 자신이 지금까지 관심을 기울여 온 도학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동료 유생들은
유교의 기본이랄 수 있는 도학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흥이나 풍류 등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먼 오락에 오히려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황은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학문을 연구 하였습니다.
그 결과 1527년 이황이 27세 때 향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또 좋은 소식은 부인 허씨가 차남을 출생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부인 허씨가 별세 하였습니다. 별세란 사람이
죽은 것을 뜻합니다. 부인 허씨가 별세하니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황은30세 때 권씨와 재혼을
하였습니다. 권씨는 장남과 차남을 친자식처럼 여겼습니다.
마음을 놓은 이황은 또 다시 학문에 일제히 힘을 기울였습니다.
1534년 34세 때 문과 장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도하고 4월 ,부정자 겸직도 하였습니다.
7월에 책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성으로 올라와 학문을 더욱 닦고 12월에 무공랑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6세 때 3월에 선무랑이 되고 ,6월에 성균관 전적 겸 중학교수가 되고 ,9월에 호조좌랑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황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황은 안동 온계리 마을이 있는 곳을 향하여 엎드려 절을 하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황은 서둘러 온계리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슬퍼하는 이황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서울에 오자마자 이황은 종6품 벼슬인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자 수찬 지제교로 승진되었습니다.
이황은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습니다. 종 6품 벼슬인 사간원 정언은 임금에게 바른말을 올리는 자리였습니다. 이황은 비록 임금의 앞이라도 항상 바른말만을 하였습니다.
1541년 5월, 이황은 자문 점마관으로 뽑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을 왕래하는 문서를 전달하는 벼슬이었습니다.
자문 점마관으로 의주 땅을 다녀오게 된 이황은 그 후, 세자 시강원 문학을 맡게 되었습니다. 세자 시강원은 세자의
공부를 가르치는 처소로서, 이황은 세자의 스승이 된 것이었습니다.1543년 이황은 마흔세 살 때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 지방의
민정을 살피러 떠났습니다.
1546년 7월 46세 때 이황은 두 번째 부인 권씨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황은 온계리로 내려왔습니다.
온계리에는 맑은 시내가 있었습니다. 그 토계라는 그 시내의 이름을 퇴계라고 고치고, 퇴계를 자기 호로 삼았습니다. 그는
퇴계 시내 근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양진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부인을 두 번이나 잃은 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은
집이었습니다.
1547년 47세 때는 예문관 응교가 되었습니다.
1548년 48세 때 1월에 단양 군수 부임을 하고, 10월에 풍기 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48세 때 않 좋은 소식은 둘째아들 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황의 둘째 아들은 장가를 든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황은 자식도 없이 혼자가 된 둘째 며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편을 여읜 여인이 평생 혼자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황은 둘째 며느리를 다시 결혼시키고 싶었지만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황은 며느리를 처가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옛날에는 한 번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 이라고 하여 죽어도 시댁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출가외인인 며느리를 처가로 돌려 보내는 것은 자유를 준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며느리는 울면서 처가로 떠났고, 이황도 다시는 사랑하는 며느리를 못만난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1549년 나이 49세때 12월, 관찰사에게 백문동 서원에 편액과 서적을 내리게 할 것을 창했습니다. 그리고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550년 2월에 한서암을 지으고 1552년에는 대사성에 올랐습니다.
1556년에는 <<주자서 절요>>를 편찬하고 1557년에는 유명한 도산 서원 건립 착수 하였습니다.
1558년에는 아주 반가운 선비가 이황에게 들렸습니다.
바로 율곡 이이 였습니다. 이이는 이황에게 ‘무오 사직소’를 올리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이황과 이이의 두터은 정은 이황이 죽을 때까지 이어져 항상 안부의 편지나 시를 써서 오가고 했습니다. 1559년 59세 때는 제자 기대승과 ‘사칠론’을 시작했고 1565년 65세 때는 도산 12곡을 편찬 하셨습니다.
1568년 68세 때 ‘무진 육조소’,‘성학 십도’를 임금께 올렸습니다.
1570년 70세 때 12월 8일에 안타깝게도 이황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퇴계 이황은 갔지만 그는 네 임금의 스승이 되어 올바른 정치를 펴도록 했고, 많은 책을 써서 우리 겨레의 후세들이 갈 길을 밝혀 주었습니다.
역사상 이름난 학자 김성일 ,조월천 ,유성룡 ,기대승 같은 사람들을 길러 냈고, 장현광 ,허목 같은 학자도 퇴계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퇴계 이황은 우리나라의 큰 스승이요, 동방에 가장 위대한 학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의 높은 사상과 학문은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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