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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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북이초 | 등록일 | 08.07.22 | 조회수 | 86 |
유관순 7월13일 글 손연자 그림 양후영
나는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찮게 유관순 위인전기를 찾았다. 유관순은 1904년에 충남 천안군 동면 지령리에서 태어 났다. 관순은 아버지로 부터 1905년 일본과 강제로 맺은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에 '한일 합방' 에 대한 억울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향에 친구들과함께 '홍호 학교'를 세웠다. 재정난으로 인해 농토를 팔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1916년, 13세에 지령리 교회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 하였습니다. 사감으로 있던 하란사 선생님으로 부터 민족의 독립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19년 16세에 고등과 1년때에 결사대인 이문회 회원이 되었다. 이문회란, 이성회, 하란사, 선생의 도움으로 이화학생 자치단체이다. 고나순은 3.1운동에 가담하여 김한나, 윤성덕 등과 종로 경찰서에 붙잡혓다가 풀렸습니다.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예도언니와 고행으로 내려왔다. 고향에서 아버지, 오빠와 함께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음력 3월10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집은 불태워 졌고, 오빠는 공주 경찰서에, 관순은 천안 경찰서에 붙잡혔다. 공주 지방법원에서 3년 확정 판결을 받고, 서울 복심법원에 상고 서울서 재판도중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진 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17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는도중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기에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그래서 밥주는 사람이 밥에 쇳가루와 모래가루를 타줘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쇳가루는 쫌심하다.. 그래도 이 분 덕분에 우리나라가 지금 좋다..(뒷마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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