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이혈)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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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11.29 | 조회수 | 152 |
사림 세력을 제대로 키우려면 조정 안에 사림들이 일할 부서가 필요했다. 세종의 집현전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종이 만든 것이 홍문관이다. 홍문관은 서적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이곳에 뛰어난 문신들을 두고, 유교 서적을읽으며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훗날 이들이 성종의 비서 역할을 하며 자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왕권 강화에 집중하다 보니, 성종은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후손을 잇기 위해 중전 외에 9명의 후궁들을 두고, 무려 28명의 자식을 낳앗다. 하지만 중전인 윤씨의 질투가 심해, 후궁들을 괴롭해고, 심지어는 후궁들을 죽이기 위해 비상을 보관하고 있다 발각되기까지 한 것이다.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성종은 벌로 윤씨를 별궁에 근신하게 했는데,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윤씨는 왕인 스의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냈다. 성종은 결국 윤씨를 중전에서 폐하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하지만 이 일이 세자였던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들 줄은 전혀 몰랐다. 당시 조선은 유학을 중심으로 제대로 서기 시작했다. 하짐나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는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다. 십지어 사대부 가문에서 승려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태조는 도첩제를 실시했다. 도첩제는 부녀자는 승려가 될 수 없게 하고, 양반가에서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는 100필의 포를, 양인 150필, 천민 200필의 포를 세금으로 내게 한 제도다. 이건 너머나 큰 금액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금지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양반가에서 이런 큰 돈을 내고도 승려가 되는 이들이 나오자, 성종은 1492년부터 도첩제마저 폐지해, 누구도 승려가 될 수 없게 했다. 백성들에게 유교를 가르치기 위한 노력도 함께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했으니, 음악에 유교 내용을 녹여내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악학궤법>이었다. 이외에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과 예절에 관한 여러 책들을 편찬했고, 역사서 <동국통감>, 지리서 <동국여지승람>도 편찬했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인 1494년. 성종은 여름에 더위를 먹어 앓아 누웠다가, 가을에는 폐병까지 도져서 계속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누워 있다 보니, 등창까지 생겨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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