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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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11.29 | 조회수 | 221 |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든 것으로 유명한 논개는 흔히 기생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는 확실하지않다. 물론, 조선 시대 문헌들에 '논개가 진주 관청의 기생, 즉 관기'라고 적혀 있지만, 그가 기생이 아니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1960년대 들어서 많은 학자들이 논개를 새로 연구한 결과,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양반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엇던 최경회의 후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의병장 최경회의 삶이 기록된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휴당실기>에는 '최경회의 후처가 최경회가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적장을 바위 쪽으로 유인해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어 지금까지 ㅈ사람들은 그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른다'라는 문구가 실려 있다. 최경회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에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논개가 왜적에게 복수하고자, 기생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왜장을 유인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1592년 있었던 왜군의 첫 공격은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의병, 백성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진주대첩니다. 이에 왜군은 9만여 명의 군을 이끌고 와 1593년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것을 2차 진주성 싸움이라고 한다. 전투는 10일간 계속되었고, 조선은 결국 왜군에게 패배해 진주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왜군은 승리를 축하하며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논개가 이 자리에 나타나 왜장을 유인해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허무하게 장수를 잃은 왜군들의 사기는 금세 땅에 떨어졌다.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이미 군사와 식량을 잃은 데다, 논개에 의해 장수까지 잃게 되자, 복수는 커녕 싸울 힘이 없어진 것이다. 결국 왜군은 전라도 지역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진주를 떠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 시대는 여성, 첩, 기생이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를 위해 높은 공을 세웠어도 기록으로 남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기록을 남기기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에는 논개가 누구였는지,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은 무엇인지 등 당시 사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이 기록되지 못했다. 논개의 죽음은 논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를 조선 시대 문학가인 유몽인이 1620년경 <어우야담>이라는 책에 기록하면서 논개의 공적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진주 사람들은 논개가 강물로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며 해마다 남강에서 그의 죽음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그 이후로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10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논개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을 인정해 의암사적비를 세워 공식적으로 공로를 인정했고, 그 뒤에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까지 의암 부근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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