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 주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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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11.28 | 조회수 | 179 |
주시경이 살던 시대는 훈민정음이 차별받는 시대였다. 주시경도 어릴 때는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그러다 '한문 공부는 뜻을 배우는 것이니, 그 뜻을 우리말과 글로 배우면 훨씬 쉽고 편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또 훈민정음이 천한 글자로 취급받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라의 기둥인 말과 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가꾸지 못한다면 그 민족은 망할 것."이라며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훈민정음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ㅐ재학당 학생이었던 주시경은 당시 <독립신문>ㅇ을 창간하고 배재학당에서 강사로 일하던 서재필을 만난다. 이후 주시경은 1896년 서재필의 추천으로 <독립신문>에서 글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한다. <독립신문>은 한글이 사용된 최초의 신문으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보다도 싼 가격에 팔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했다. 덕분에 한글이 더 널리 퍼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한글은 주시경이 1910년대 훈민정음을 높여 부르면서 생긴 명칭이다. 훈민정음은 한자를 읽기 위한 보조 수단이라는 의미로 한자의 발음 표기법을 뜻하는 '반절', 평민이나 상민, 부녀자들이 쓰는 언어라고 하여 '언문'등으로 오랫동안 낮춰 불렸다. 심지어 음절의 차례가 '가갸거겨고교..."로 돼 있다고 해서 '가갸말'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러다 주시경이 1910년대 여러 책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한글'이라고 표기하면서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처음엔 훈민정음도 한자처럼 모두 붙여 쓰고, 필요하면 공백에 동그라미 등을 사용해 적었는데, 주시경이 한글을 쉽게 알아보도록 띄어 쓰면서 지금의 띄어쓰기로 정책됐다. 주시경은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통해 자주독립 정신을 심어 주려고 전국의 학교를 돌며 국어 강습회를 열었다.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아 수많은 학교에서 강습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학교들의 사정이 좋지 못해 주시경은 돈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의하러 나갔다. 하지만 그의 한글 교육도 위기를 맞는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 일본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면서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라 가르쳤고, 한국어는 선택 과목이 됐다. 한글 학자에 대한 핍박도 점점 심해져 주시경의 한글 강습은 점점 더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주시경은 굴하지 않고 학교가 쉬는 날에는 비밀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쳤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어두운 집에서도 한글 연구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의 감시 탓에 그의 동지들은 하나둘 외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주시경도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지만, 1914년 그는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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