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이황)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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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11.21 | 조회수 | 136 |
남이의 역모를 예종에게 고했던 유자광은 조선 시대 3대 간신으로 손꼽힐 정도로 간교한 인물이었다. 서얼로 태어난 유자광은 문과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유자광은 서얼도 응시 가능한 무과에 도전해 급제했고, 이후 남이 장군의 역모 계획을 알려, 결국 공신에 책봉된다. 이렇게 예종에 의해 공신에 오른 유자광은 이후 연산군 대에는 사화를 일으키는 등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듯, 왕권 강화도 국가 재정이 튼튼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예종은 둔전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둔전은 북방지역처럼 이민족의 침입이 잦은 곳에 군량미를 얻기 위해 마련해 놓은 땅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따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민족의 침입이 없을 때는 이 지역의 지방 관리들이 둔전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돈을 벌어 세력을 키우는 데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지방 세력이 커지면 왕권 강화에 해가 된다. 그래서 예종은 평상시에는 둔전에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게 해 세금을 거두며 지방세력도 억제하고, 국가 재정도 확충했다. 예종은 직전수조법을 만든 후, 또 나라 살림에 도움 될 것이 없나 살펴보던 중, 삼포에서 개별 무역이 성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나라에 허가를 받고, 세금을 내는 이들만 무역이 가능했다. 그런데 삼포에서 제멋대로 무역을 하면 나라로 들어오는 세금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예종은 이후 삼포에서의 개별 무역을 엄격히 금지해 나라의 재정을 확충했다. 이렇게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공신들의 기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게다가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 왕후마저도 이들 편에 선 채, 예종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예종은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둘러보니, 세조 대에 단종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방으로 내려간 생육신의 제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이후 조정의 빈 자리가 생길 때마다 사림파를 불러들여, 훈구파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경국대전>이 성종 대에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경국대전>은 세조 대에 만들기 시작해, 예종의 대에 이미 왼성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종은 <경국대전>의 완성 사실을 죽기 전에 미처 반포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종의 업적이 될 수도 있었던 <경국대전>완성의 공이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예종은 본래 몸이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발에 상처를 입었는데, 이게 잘 낫지 않더니 점점 더 심하게 부어 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별스럽지 않게 여겼는데 아침에그의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다녀온 뒤 갑자기 쓰러져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왕권 강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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