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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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11.05 | 조회수 | 33 |
전봉준은 전라북도의 한 마을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너무 키가 작아 식물 중에서도 키가 작은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훗날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후에는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다. 가난했던 전봉준은 생계를 위해 서당의 훈장, 약장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 등 다양한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는 가난한 민중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한다. 보다 못한 전봉준의 아버지가 관아에서 백성의 고통을 호소했짐나, 조병갑은 그를 매질해 죽게 했다. 전봉준은 아버지의 복수와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을 내쫓고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눠 주었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조선 말기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 씨 일가와 흥선대원군이 서로 세력을 겨루던 때였다. 명성황후와 민 씨 일가는 동학농민군을 어떻게든 진압하려고 했는데, 동학농민군이 요구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 개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봉준을 포함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은 흥선대원군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 씨 일가의 반대편에 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필요하다고 판ㄴ단했기 때문이다. 즉 명성황후와 외세라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위해 흥선대원군과 동학농민군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봉준이 흥선대원군 등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분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동학농민군의 성격상, 권력자와 어떤 접촉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양반이라도, 정부의 사람이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흥선대원군을 그런 대상 중 하나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부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동학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전주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면 해산하겠다고 정부에 제안한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하낟.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요청한 군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자 조선을 차지하고 싶어한 일본이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오는 것을 막으려고 청과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이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이에 동학농민군이 삼례에서 다시 일어났다. 충청도의 농민군까지 합세해 10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결국 패배하고, 이후 전봉준과 지도자들이 붙잡히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안타깝게도 끝이 난다. 체포된 전봉준은 의금부에 갇혀 고문당하다 교수형에 처해져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전봉준이 처형되자, 사람들은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을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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