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성중학교 로고이미지

신혜인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세조(이유)
작성자 신혜인 등록일 17.10.19 조회수 24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 대신들은 제 세상을 마난 듯 왕을 허수아비로 두고,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왕가의 일원인 세조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처단하고, 직접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왕위에 오른 세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왕권 강화였다. 육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는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켰다. 육조의 보고가 의정부를 거치게 되면, 의정부의 판단에 따라 누락되거나 바뀌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약화시키고 왕권은 강화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거다.
 이후 세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준이 될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중국의 법을 가져다 썼는데, 그건 조선의 실정에 딱 맞지 않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에는 조선의 구조와 관직, 왕권에 대한 규정을 모두 담았다. 하지만 나라의 거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이런 엄청난 법전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세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 국가 재정에 관한 법전인 <호전>과 형벌을 담당하는 법전인 <형전>만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왕권 강화의 밑거름은 세금.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해, 세조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했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한 집이 세금을 내지 않고 달아나면 나머지 집들이 이들의 세금까지 내게  해, 서로 감시하며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런 방법을 만든 이는 한명회였다. 그는 과거시험에 번번이 떨어져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세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으고, 적이 될이들은 과감하게 제거하며 세조를 도와 주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를 네 번이나 일등 공신에 책봉했고, 그의 딸들은 8대 예종, 9대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
 역모를 꾸미던 6명의 대신들을 본보기로 처단했는데도, 여전히 세조가 왕이 된것에 불만을 품거나 세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에 세조는 그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이들이 많던 집현전을 폐쇄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그중 김시습은 아무리 벼슬을 내려도 끝끝내 거부하며, 세조의 허락도 없이 사육신의 시신까지 묻어 주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사육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끊임엇이 세조의 심기를 건드리기까지 했다. 김시습 외에도, 원호, 조려, 성담수, 이맹전, 남효온 등 6명의 신하들은 단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평생 숨어 살았다.
이전글 세조(이유)-2
다음글 이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