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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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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작성자 신혜인 등록일 17.10.18 조회수 17
 이완용은 25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후, 신식 학교인 육영학원에 입학해서 누구보다 빨리 영어를 익혔고, 두 차례나 미국으로 파견돼 나랏일을 했다. 그 결과 조선인 중 가장 영어를 잘하고 미국과 유렵등 서구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즈음 조선에서는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세력이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가자,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조선에는 러시아와 미국 같은 서구 세력을 지지하는 정치 무리가 생겼고, 이완용은 이 무리의 리더가 됐다. 그러니 이때만 해도 이완용은 일본의 미움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정치 개혁을 위해 활동한 단체로, 처음에는 친미 성향 인물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친미로 노선을 바꾼 이완용도 여기에 참여해, 독립협회의 초대 위원장과 2대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모금한 보조금 510원의 5분의 1가량에 해당하는 큰돈을 내기도 했다. 독립협회는 이 돈으로 독립문을 만들어 청의 속박에서 벗어난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당시 명필로 유명했던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까지 썼다고 추정된다. 러시아와 독립협회 모두에게 외면당한 이완용은 8년 동안 주요 관직을 떠나 있다가 복귀한다. 이때는 일본이 러일전쟁마저 승리해, 한반도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쥐고 노골적인 침탈을 시작할 때였다. 이때부터 이완용은 귀신같이 '친일'로 태세를 전환, '일본의 요구는 부득이한 대세'라며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에 서명하는 등 완전한 민족 반역의 길로 들어섰다.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빼앗으려고 설치한 조선통감부에 적극 협조한다. 고종을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대한제국의 인사, 입법, 행정,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긴다. 이에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명동성당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해 기다리다가,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습격해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완용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지고, 이재명 의사는 그 자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가 잡혀 결국 사형을 당한다. 건강을 회복한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겨주는 등 일본에 계속 충성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고위직을 두루 지낸다. 재산도 1925년 다시 300만 원(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달했고, 전국ㅇ에 차지한 땅의 면적이 현재 서울 면적의 두배가 넘었다. 그리고 69세까지 살다 집에서 가족과 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도 일본의 후원 아래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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