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홍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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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9.28 | 조회수 | 20 |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왕위에 올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문종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는지, 그 누구도 왕을 위협하는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분경금지'조항을 만들어 두었다. 분경금지란 왕족이나 권세가들이 하급관리들의 관직 청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누군가 자기 아래 큰 세력을 만드는 걸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삼촌인 수양 대군만은 분경금지에 격렬히 반대해 결국 예외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기댈 곳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밖에 없었다. 고명대신들은 왕의 결정이 필요한 문서를 단종에게 올릴 때 의정부에서 미리 결론을 내리고 노란 점으로 표새해 올렸다. 그러면 단종은 그 노란 점을 보고, 그대로 따르면 되었다. 이를 '황표정사'라고 불렀는데, 황표정사가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의정부의 우두머리 격인 김종서가 허수아비 왕을 앉혀두고, 조선을 좌지우지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양 대군은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스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정도로, 왕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이것은 호랑이가 발톱을 숩기고 때를 기다린 것에 불과했다. 황표정사가 횡횡하자, 수양 대군은 더 이상 김종서 무리가 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1453년 10월 10일 수양 대군은 불시에 김종서의 집에 쳐들어가 김종서와 그의 아들들까지 모두 제거했다. 이후 수양 대군은 한양의 사대문을 꽁공 잠그고, 단종에게는 김종서가 역모를 일으키려 해 먼저 처단했다고 거짓을 고했다. 그리고 수양 대군의 책사인 한명회가 만든 살생부에 따라 평소 자신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을 한 명씩 궁으로 불러들여 하룻밤 사이에 모두 제거해 버린다. 하루만에 조선의 모든 권력을 쥐게 된 수양 대군이었지만, 계유정난 뒤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대신 '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라는 관직에 올랐다. 이름도 긴 이관직은 '영의정이자, 경연관의 총책임자, 이조판서, 병조판서'의 자리를 모두 합친 것이었다. 보름 뒤에 '병마도통사'까지 맡아, 결국 수양 대군은 조선의 모든 권력을 혼자서 장악했다. 계유정난 몇 달 뒤인 1454년 3월, 수양 대군은 자신이 실권을 잡는 데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수하들에게 조정의 나머지 자리들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자신의 동생이기돈 한 안평 대군이 수양 대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자, 미리 만란의 싹을 잘라낸 것이다. 그렇게 이름뿐인 왕으로 지낸 지 1년. 그나마 그때까지는 왕이라는 이름이라도 지킬 수 있었지만 끝내 수양 대군은 허울뿐인 왕의 자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종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압박해 결국 단종은 스스로 상ㅎ왕으로 물러나고, 수양 대군이 왕의 자리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단종이 이렇게까지 했던 건 유배를 갔던 얀평 대군이 죽고, 단종을 지지하던 금성 대군 마저 유배 당하는 모습을 보며,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수양 대군이 원하는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왕이 되어 궁궐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세종에게 단종의 안위를 부탁 받았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이 단종의 복위 운동을 준비했다. 단종 역시 이들에게 칼을 하사하며, 거사의 성공을 기원했다. 그들의 계획은 연회날, 세조와 그의 아들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결전의 날이 밝기도 전에 함께 준비하던 김질이 비밀을 누설해, 복위 운동을 하던 모든 이들은 엄청난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세조에게 더이상 단종은 조카가 아니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국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쪽은 험준한 산에 가로막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천연 감옥이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금성 대군은 순흥 부사였던 이보흠 등이 금성 대군과 함께 복위 운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 역시 관의 노비에 의해 새어나갔고, 제대로 된 난 한 번 일으키지 못하고 관련 인물들이 붙잡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단종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위협이라는 것이 또 한 번 증명되자, 결국 세조는 더 참지 못하고, 나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렇게 단종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주려 하지 않았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줬다가는 세조에게 어떤 화를 입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월군 향리의 우두머리였던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 주었다. 왕이면서도 이렇게 초라하게 죽었던 단종의 무덤은 242년이 지난, 1698년에야 제대로 된 봉분을 갖추고, 장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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