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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내 인생의 맞춤형 상담센터
작성자 양재숙 등록일 12.04.04 조회수 244

철학자들은 내 인생의 맞춤형 상담센터

청소년이 철학 공부할 때 알아둬야 할 것들

내 생활 들여다보기
내 질문 만들어보기
소신 갖고 당당하기

철학수업 첫 시간. “철학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를 학생들에게 물었다. 주저 없이 돌아온 대답은 하나같이 대립쌍을 이룬다.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어려운 것’, ‘관심은 있지만 배우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알아도 써먹을 데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도 추가된다. 학생들에게 철학은 이것들의 종합세트다.

철학은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다. 땀 흘려 산에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재미있다. 퍼즐의 아귀를 맞추는 게임도 복잡하지만 재미있다. 어려움과 재미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나에게 왜 필요한지를 알고 하는 고생은 오히려 활력을 준다. 나에게 다가온 철학적 사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문제는 철학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은 내 삶을 공부하는 방법과 일치한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과 사랑하고 싸우며 산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지치고 늘 잠이 쏟아진다. 알쏭달쏭한 문제 앞에서 회피하기도 하고, 가끔은 죽음에 대해 고민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철학자들이 탐구해 온 근본 문제였다. 삶의 중심을 찾으려는 노력은 인생 전체를 바로 세운다. 따라서, 철학자를 외울 것이 아니라 내 생활을 먼저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철학함의 첫째 방법이다.

한편, 싸우는 문제도 철학자들에게는 소중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운을 보고 만물의 원리에까지 나아갔다. 낮은 밤을 몰아내고 생명은 죽음으로 나아가며 전쟁은 평화를 깨서 삶을 재편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결국 대립물의 싸움이 만물을 진행하게 하는 원리라는 설명이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의 주역에 담겨 있는 음양론적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대립물을 검토해 본 후 그것을 관통하는 원리를 탐색하는 것은 철학적 탐구의 핵심이다. 근원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 종합적으로 크게 검토할 것, 철학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담은 사회와 우주가 싸움으로 이루어진다는 식의 신비스러운 설명이 이 과학의 시대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가치 있는 이야기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이 질문에 작동하는 원리가 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가령 연인에게 실연을 당하거나 직장 동료에 대한 질투심으로 괴롭다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의 철학을 접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자기 문제를 다루었던 자세이다. 모든 이론은 자기 시대의 문제에 대해 철학자들이 제출한 답안지이다. 시대는 달라도 해법에는 영양소가 가득하다. 내가 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가 내 답안지를 결정할 터. 이 질문을 갖고 철학서를 펼쳐 들면 철학자들이 대기중인 맞춤형 상담센터로 변신한다. 내 질문을 만드는 것, 이것이 철학함의 두 번째 방법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바쁜 우리 학생들에게는 무언가를 충분히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 산다는 것은 지치고 졸리고 피곤함의 터널 같다. 그러니 비슷한 처지의 철학자도 찾아보자.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로마의 황금기를 구가한 황제였으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무척 안쓰럽다. 낮에는 이민족과 전쟁을 하고 밤에는 막사에서 사색을 하는 삶이라니. <명상록>에서 그가 육체적 피로와 전쟁의 긴장, 정책 결정의 괴로움, 인간관계에 대한 분노 등을 겪으면서 남긴 성찰의 기록들을 보자. 삶의 무게가 철학 근육이 되어 다시 그 삶을 돕는 힘이라는 점을 알게 해준다.

잠이 많은 학생은 데카르트의 삶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걱정인 학생들은 스피노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 늘 병약하고 잠이 많아 침대에 누워 사색하던 습관을 가진 데카르트는 매일 밤 열 시간을 자야 했고,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는 잠꾸러기였다. 잠을 방해받을까봐 방문객을 피하려고 13번이나 이사를 다닐 정도였다. 꿈꾸듯 몽롱한 시간에 생각하기를 즐겼던 그의 습관은 전쟁 중에도 이어졌다. 한 난롯가에 앉아 졸듯이 사색을 펼치다가 철학체계 전체를 완전히 새로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근대적 세계관의 포문을 연 합리주의 철학이 이런 생활태도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피노자의 삶은 지독히도 가난했지만 역시 지독하게 경건하고 굳세었다. 자신의 사상 때문에 유대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여 사회적 왕따가 되었으면서도 ‘진리 앞에서’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안경 렌즈를 닦는 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정교수직 제안을 거절한 사연은 유명하다. 자유로운 철학을 위해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겠다는 소신은 그에게 외로움과 겸손함을 남겼다. 우리들이 그처럼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진리를 위한 열정이 삶의 양분임을 일깨우는 역사 속 멘토임은 분명해 보인다. 철학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영혼의 우물에서 솟아난다. 이 우물에 물을 채우기 위해 소신과 당당함을 밀고 나가는 것, 철학함의 세 번째 방법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멘토로 보길 권한다. 사실, 내가 인생에서 어려워하고 궁금해하는 모든 사건마다 철학의 멘토가 숨어 있다. 애정과 보살핌이 필요할 때는 부버나 매슬로가 찾아올 테고, 어느 한낮 죽음에 대한 상상에 갑자기 멍해진다면 소크라테스나 하이데거가 방문할지도 모른다. 인생에 해답이란 있겠냐며 이도 저도 판단 내리지 못해 괴롭다면 인식론적 판단중지를 권했던 피론이나 시비에서 초탈하라는 장자 같은 사람도 대기하고 있다. 어느 길로 가건 삶의 질문에 마주서면 그곳엔 이미 철학자가 기다리는 중이다. 내 삶의 질문을 엉뚱하고 쓸모없다 말하는 사회야말로 모질고 쓸모없다. 학생들은 당장 팀을 짜서 책을 읽고 활동하고 질문하고 토론을 해보자. 안 풀리고 답도 없고 생각을 나누는 모든 골짜기에서 우리 시대 철학도 새싹이 돋을 것이다.

봄에 핀 꽃처럼 잊었다가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황홀하고 싱그럽다. 익숙한 것에 대한 새로운 각성, 난해하지만 재미있는 철학의 맛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과 같은 법. 굳은 어깨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자, 당신이 바로 철학자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교사   한겨레신문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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