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의 삼국 가운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지금의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네이버 지식백과] 신라 [新羅] - 시작은 늦었지만 착실히 성장한 신라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주)북이십일 아울북) 늦게 국가의 모양새를 갖춘 나라 신라는 금성(경주)에서 시작한 나라로 큰 산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의 접촉이 어려웠고,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지. 또 왜의 침략을 자주 받아 삼국 중 가장 늦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고 한참 동안 세력을 키우지 못했어. 신라에 왜군이 침입했을 땐,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지원병을 보내 도와준 적도 있어.
이제 나라 이름은 ‘신라’ 신라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건 지증왕 때부터야.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어. 이어서 정치 제도를 갖추어 나갔어. 지방 제도인 주·군 제도를 정비하고 관리를 파견했어. 이것은 신라가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는 뜻이야. 이렇게 안으로 정비된 국력을 바탕으로 밖으로 진출했어.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했어. 우산국은 이때부터 우리 역사 속에 포함된 거야. 이렇게 신라의 힘을 하나로 모은 후, 왕호를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을 ‘신라’로 부르게 했어.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 [新羅] - 시작은 늦었지만 착실히 성장한 신라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주)북이십일 아울북)졸본(卒本) 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한 고대국가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끈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 동가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국내성(통구)으로 천도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야 지대로 진출하는 한편, 중국이 설치한 한사군과의 투쟁 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태조왕 때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현도군을 축출하고,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마련하고, 5부의 행정 구역을 설정하는 등 왕권을 보다 강화하였다. 4세기 초 미천왕 때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인재 양성을 위해 태학을 설립하며,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대규모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장수왕 때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진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에 수·당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서 세력 확대를 꾀하자 살수 대첩과 안시성 싸움에서 이를 막아내며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高句麗]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8. 5., (주)북이십일 아울북)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高句麗] (두산백과)기원전 18~기원후 660년.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서 발전한 나라.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과 함께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이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나라가 빨리 발전하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여 한강 주변을 통합하고, 율령을 발표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였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황해도 일대와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고,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활동 무대를 넓혔다. 또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일본의 고대 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475)하고, 성왕 때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겨(538) 나라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을 일시 되찾았으나, 동맹국인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오히려 관산성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무왕과 의자왕 때 부활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 [百濟]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8. 5., (주)북이십일 아울북)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과 함께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이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나라가 빨리 발전하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여 한강 주변을 통합하고, 율령을 발표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였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황해도 일대와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고,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활동 무대를 넓혔다. 또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일본의 고대 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475)하고, 성왕 때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겨(538) 나라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 한강 유역을 일시 되찾았으나, 동맹국인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오히려 관산성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무왕과 의자왕 때 부활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 [百濟]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8. 5., (주)북이십일 아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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