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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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영춘 | 등록일 | 10.06.29 | 조회수 | 45 |
회사령 철폐로 인해 일본기업들이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킨 반면, 1920년대에 조선의 민족자본 회사 역시 점차 증가되면서 민족 기업을 지원하고, 민족 경제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하게 된다. 1923년 1월 9일,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열었고, 이어서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민족단체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물산장려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구호는 '조선사람 조선으로!','우리 것으로만 살자!'였다. 주요 강령은 다음과 같다.
이 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등이 이광수의 지도 아래 자작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렇게 비롯된 국산품 애용운동은 일본 기업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조선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이 움직임이 인천을 거쳐 경성에서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경성에서 조직된 '토산품애용부인회'와 경상남도 의령에서 시작된 '토산품장려 및 금연실천운동'등,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주단연운동, 토산품 애용운동은 상인들 모두 동참하고 협력하면서 거족적 애국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한계와 비판 [편집]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운동 자체에 여러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들어서 토산품만 사용하다 보니 토산품 가격이 크게 폭등하여 올랐고, 이는 곧 상인과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만 낳게 되어버린다. 이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과 지각있는 민중들이 '물산장려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여기에 일본 제국 총독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영효,유성준같은 친일세력들의 관여로 일제와 타협하게 되는등 변질이 되어 감에따라 여러가지 이유가 더해지게 되고, 쇠퇴해 져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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