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2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선생님 : 이영미
  • 학생수 : 남 18명 / 여 14명

사회137쪽

이름 정은지 등록일 10.06.29 조회수 56

 

청산리 대첩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 8시에 시작되어 26일 저녁까지 6일간을 꼬박 새우며 싸운 6일 전쟁이었다. 10월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그리고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고동하 전투 등 6일간에 걸친 일련의 접전을 통틀어서 청산리 전투라 하는 것이다.
청산리대첩에 있어서의 주력부대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병력 1,600명이었다. 독립군 총병력 2,000명 중 80%가 북로 군정서 군이었던 것이다. 북로 군정서는 왕청현 십리 평에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 중국군 측으로부터 조속히 현지를 떠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김좌진은 부대를 백두산 골짜기 깊숙이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지는 화룡현 청산리였다. 해란 강을 따라 이동해 가는 독립군의 행렬은 십 여 리에 뻗쳤으니 무기를 실은 수레만 하드라도 180여대에 이르렀다. 비전투원까지 합하면 2,800명이나 되는 대식구, 거기다 대포 탄환 등 군 장비를 실은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이동하고 있었으니 장관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뒤를 바짝 일본군이 추적하고 있었으니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김좌진은 먼저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어 제1제대는 자신이 맡고 제2제대는 이범석이 맡게 했다. 그리하여 제 빨리 백운평 계곡 높은 바위에 매복시켜 방어진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을 기다렸다. 백운평은 좌 우측이 수풀과 험한 바위로 둘러 쌓여 있어 적을 공격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적은 독립군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골짜기에 들어섰다. 동시에 독립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어 적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때는 1920년 10월 21일 아침 8시, 적의 선발대 200명은 순식간에 쓰러져 죽어갔다. 이 전투는 이튿날 새벽 2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같은 10월 20일 오후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라는 곳에서 일본군 추격 군과 조우하여 400여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를 완루구 전투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컸던 전투는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하여 적을 물리친 어랑촌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왜 일어 났나?

 - 3·15부정선거, 자유당 정권의 독재

 - 군부의 쿠테타, 평화적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

 - 박종철·이한열 등의 죽음, 민주적인 형법에 대한 요구

어떤 일이 일어났나?

- 1. 학생중심으로 일반시민과 교수들도 뜻을 같이함.

 2. 이승만 정권 퇴진.

 - 1. 민주화 시위 발생

 2. 광주시민이 주도

 3. 강제 진압으로 많은 시민들이 희생 당함.

- 1. 학생, 시민, 노동자들이 주도

 2. 6·29 선언

 3. 대통령 직선제 등의 민주적인 헌법 마련

공통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

민주주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전글 물산장려운동
다음글 사회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