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연곡리 석비
종 목 보물 제404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2 시 대 고려시대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리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라고 불려 더욱 유명한 비석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얼굴면이 손상되어 말머리같이 되었으며 앞 발톱이 파손되었다. 등 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주고 비몸을 받치는 받침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비머리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거북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와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형태 등 고려 초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립 연대나 양식상 월광사 원랑선사비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2.영수사 영산회괘불탱 종 목 보물 제1551호 지 정 일 2008.03.12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산542 시 대 조선시대 영수사 괘불은 『묘법연화경』에 의거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문중을 중심으로 그린 영산회상도로서, 1653년 명옥을 비롯한 4명의 승려화원들이 그렸다. 석가모니의 대좌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사리불을 비롯하여 좌우에 시립한 많은 권속의 묘사는 조선후기 영산회상도 중에서도 영산회상을 가장 장엄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밝은 채색과 유려한 필치, 다양하면서도 능숙한 인물묘사가 돋보인다.
영수사 괘불은 제작시기가 1653년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시기성, 사리불이 청법자로 등장하는 가장 빠른 괘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보이지만 17세기 영산회상도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3.산수리 백제요지
종 목 사적 제325호 지 정 일 1988.02.27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196-3 시 대 백제
1987년도에 시행된 중부고속도로 건설구간의 문화유적조사 중 대전 한남대학교 발굴단이 발견하여 다음 해에 발굴조사된 서기 4세기경의 백제토기 요지군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8기의 토기요지가 조사되었는데 길이 3m내외 소형이 4기, 8m내외의 대형이 4기였다. 소형은 능선 바로 가까이에 대형은 그보다 약간 아래 경사 면에 위치해 있었다.
기본 구조는 모두 같아 아궁이의 바로 밑이 불때는 곳인 수직식 연소실과 토기를 놓았던 연소실로 구성된 등요였다. 그러나 소형은 바닥과 벽이 지하로 들어가 지하에 설치된 완전 지하식이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기편이 수집되었는데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두드림무늬토기)가 백제토기로 발전되어 갔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 경사면 을 이용할 수 있는 완만한 야산이 발달되어 있는 이 일대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토기의 모태가 된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요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토기 태토로 쓸 수 있는 양질의 점토산지도 인근 미호천변 속칭「어지미」들에서 확인되었는데 이 일대에서는 서기 기원전후 무렵부터 타날문토기요지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4.삼용리 백제토기요지
종 목 사적 제344호 지 정 일 1991.02.26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삼룡리 산518-10 시 대 백제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을 끼고 전개되어 있는 야산지대인 이곳 이월면 삼용리는 이웃 덕산면 산수리와 더불어 삼국시대 토기 성립과정을 알려 주는 가마터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진천 지역 토기 가마터들은 1987년에 중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일환으로 시행된 문화유적조사 중 한남대학교 발굴단이 발견하여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시대 초기의 토기. 제작기술을 규명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일대에 흩어져 있는 가마터들은 한반도에서 기원전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타날문토기를 굽던 가마터가 중심으로, 이 타날문토기가 삼국시대 토기의 모태가 되었다. 1990년도에 발굴된 이곳 삼용리 요지군에서도 서기 2-3세기경의 타날물 토기 가마터 6기가 조사되었다.
길이 2.4m에 불과한 소형부터 7.9m에 이르는 대형까지 크기는 다영하였으나 모두 바닥과 벽은 땅을 파 지하에 설치하고 천정은 지상에 나온 반지하식 등요였다. 이 가마터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연소실의 구조로, 아궁이의 바로 밑이 불을 때는 곳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수직식 연소실의 등요는 중국 전국시대 토기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 삼국시대의 타날문토기, 중국의 전국시대 토기 제작기술에 받아들여 성립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5.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
종 목 사적 제414호 지 정 일 1999.06.11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번지 외 129필지 시 대 신라
이곳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 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 2㎞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마대가 있다.
6.진천농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시 대 고려시대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 불리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의 돌다리이다.
『상산지』(1932)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m에 이르고 있다.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상판석을 얹어 놓고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7.신잡 영정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잡 선생의 영정이다.
신잡(1541∼1609) 선생은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낸 이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지기도 했다. 비단 위에 그려 놓은 그림은 가로 90㎝, 세로 167㎝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시선은 오른쪽을 바라보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사모를 쓰고, 중요의식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으며, 가슴에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가 표현되어 있다. 선생이 57세 되던 선조 40년(1607) 때의 모습을 김이섭이 그린 것으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8.진천태화사년명 마애불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1호 지 정 일 1981.05.01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7 시 대 신라
진천읍에서 동쪽으로 진천이 자랑하는 넓은 덕문리 들을 지나 10여리 가면 덕산 쪽에서 흘러오는 미호천의 한 지류를 만나게 된다. 이 개울을 건너면 바로 고개에 접어들게 된다.
넓은 찻길을 가되 양쪽에 산이 와 닿아있어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짐짓 방향이 남북으로 바뀌는 부처당고개 마루턱, 왼쪽 벼랑에 자세히 살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불상, 그리고 몇 글자의 음각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천여 년을 모진 비바람 속에 버티어 왔음인가, 고개를 지키는 기운이 다했음인가 형체는 다만 아랫부분에 옷주름을 볼 수 있을 뿐 심한 마모 속에 그 모습을 숨기려 하고 있다. 오히려 그 옆에 새겨진 몇 글자의 한자가 뚜렷하니 단국대학 정 영호 박사 팀에 의해 그 연대가 밝혀진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마애불상 머리 부분의 왼쪽에 아래로 내려 쓴 서너 줄의 한자 글씨 중 '미륵불……태화 사 년 경술 삼월 일'의 문구를 판독해 낸 것이다. 이 '태화 4년'은 연호로 네 번 등장하는 데 그 중 간지가 '경술'인 해는 수나라 명제 4년 (서기 230년) 경술이 있으나, 이 해는 너무 오랜 시기이고 신라 흥덕왕 5년(서기 83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9.진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41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진천향교는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것으로 순조 4년(180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고치고 풍화루를 지었다. 1816년에는 대성전을 고쳤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풍화루 등과 부속건물들이 남아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제사공간을 형성한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으로 이것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이 이루어진다. 풍화루는 학생들의 휴식공간이면서 누문의 기능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10.사곡리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산68-1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군 사곡리에 있는 전체 높이 7.5m의 불상으로, 큰 바위 한면을 다듬어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한 커다란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앞면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모시던 나무로 만든 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목에는 3줄로 새긴 삼도가 뚜렷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U자형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왼팔 등에도 촘촘하게 주름이 새겨져 있다. 특징적인 광배와 함께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서 형식화가 진행되는 고려시대 불상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라말의 마애불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에 만든 것 가운데 하나로 수준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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