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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권위에 대한 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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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상호 | 등록일 | 17.07.17 | 조회수 | 29 |
“1830년대 노예 소유주인 스탬프는 노예 경영에 대해 다른 노예 주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노예 길들이기 다섯 가지 단계
첫째 단계는 엄격한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다. 노예 소유주는 “노예는 항상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반드시 기쁘게 민첩하게 바로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노예 제도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미성년자의 태도, 대장에 대한 병사의 자세와도 같다.
둘째 단계는 노예에게 열등의식을 심는 것이다. 노예제도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이 가진 힘에 대한 두려움과 주인이 지닌 신성한 신분에 대한 존경에 의해 유지된다. 노예는 주인의 신성함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단계는 주인이 지닌 막강한 힘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제도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이 가진 힘에 대한 두려움과 주인이 가진 신성한 신분에 대한 존경에 의해 유지된다. 노예는 주인의 신성함을 인정해야 한다.
넷째 단계는 노예를 설득해 주인의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만들고 주인의 선행 기준을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인 개인의 이득이 곧 노예 자신의 이익이라는 생각을 각인 시켜야 한다. 노예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되면, 강제 하지 않아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다섯째 단계는 노예에게 무기력감을 심어주어 주인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습성을 들이는 것이다. 노예 스스로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며, 오로지 일시적인 안락과 오락만을 위해서 힘쓰라고 가르쳐야 한다. 주인은 이점을 고려해 노예의 의존하는 습성을 고쳐주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부단히 장려했다.
노예는 ‘성장한 아동’이다. 따라서 그에 걸맞게 다루어야 한다. 흑인은 단지 성장한 아이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병자, 범죄자가 아니라 아동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들은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꾸려나갈 수 없기 때문에 주인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성인과 아동 사이의 관계, 특히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재연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만들어진 아동』,조셉 조네이도 지음. 마고북스, 2011. 54쪽)
글을 읽고 과연 ‘합리적 권위’는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나름대로 정리해보게 되었다.
어른이 부르면 빨리 대답하고 하던 일을 제쳐놓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많이 들었다. 달려가면 ‘예의 바르다’고 칭찬을 들었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두 아이를 키우거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스스로 화가 났다. 아이가 나를 무시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무시당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3월초 담임을 맡으면 웃지 말고 엄하게 해야 1년이 편안하다는 말을 선배교사들에게 꽤 여러 번 들었고 이를 공공연히 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그밖에 얼마나 많은 사례가 있는가? 모두 기강이 확립되어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인한다. 아이들은 신체능력, 인지능력이 어른에 비해 부족한 것을 당연하다. 이를 이유로 열등감을 심어주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열등의식은 자아 정체감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자기보다 뒤진 아이들에게 군림해도 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런 자세와 사고는 개인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나를 비롯하여 ‘누구를 위해서 공부하는데’, ‘너 좋으라고 그러는 것이야’를 되풀이하는 부모나 교사를 떠올려본다. 또한 다섯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일로 모범생은 어른의 이득이 곧 자신의 이득이란 생각이 내면화 된 아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정에서 부모, 학교에서 교사가 갖는 막강한 힘을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위가 만들어 내는 권위, 외형적 차이가 만들어 내는 권위, 성별이나 나이에 의한 권위, 강요된 권위를 생각해보자.
힘에 의한 존중인가, 상호 존중을 통해 형성된 신뢰에 대한 경외인가?
그렇다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합리적인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지만 비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권위란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우러나올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러나오게 할 수 있을까? 헤게모니 개념을 체계화시킨 그람시의 ‘합의와 동의’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합의와 동의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한다. 아이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로인해 나타나는 문제를 존중해 줘야 한다. 동의와 합의 없이 일방적인 강압에 의한 지시와 명령하는 것과는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존중받음으로써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동시에 상대의 의도도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중의 마음도 갖게 될 것이다. 1920년대에 방정환을 비롯해 어린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어린이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라’이다. 또한 『아동기의 실종』(교보문고, 1994)의 저자 슈란스키도 같은 주장이다.
겉으론 순종하는 것 같지만 뒤에서 욕하고, 보는데서는 잘하지만 안 보이는 데서는 전혀 다른 행동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부모나 교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힘이나 지위에 의한 권위는 사상누각이다. 더 이상 모래 위에 누각을 세우는 일을 집어치우고 ‘합리적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부모로서, 교사로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아동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는지, 자신의 권위 행사가 합리적인지 더 나아가 관습적인 권위로 강압과 강제를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 아이를 '노예 길들이는 식'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꼼꼼히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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