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1반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넓은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서로 어울려 생활홤으로써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5학년 1반이 되겠습니다.  

어울려 사는 어린이
  • 선생님 : 연경은
  • 학생수 : 남 13명 / 여 16명

신사임당(6조)

이름 김세은 등록일 19.11.14 조회수 35

신사임당은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 침공 · 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 · 포도 · · 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율곡 이이라는 걸출한 유학자를 길러낸 현모양처의 여성이다. 고려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손 신명화와, 강릉의 참판 출신 최응현의 손녀 이씨 부인 사이에서 1504, 신사임당이 태어났다. 다섯 딸 중 둘째로 세상의 빛을 본 신사임당은 외가인 강릉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 신사임당은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오죽헌에서 시, 그림, 글씨를 전수받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결혼 후 여성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이는 낯설지 않은 문화였다.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고, 사임당은 호이다. 스스로 지은 사임당이란 호에는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태임은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자 뛰어난 부덕의 소유자였다. 신사임당은 7세부터 스스로 그림을 그렸고 뛰어난 화가로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등을 따라 그렸다.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잘 그려서, 치마에 포도물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에게 포도를 그려주었다는 신사임당 그림 일화도 있다. 1522년 사임당이 21세 되던 해에는 이원수와 결혼하고 2년 후부터 아들 선, 딸 매창, 율곡 이이를 낳으면서 43녀의 어머니가 된다. 그 때까지도 외가에서 생활하였으며, 38세 때 시집에 정착한다. 아들이 없어 더 외가에서 지낸 경향이 있으며, 부친상을 당한 후에도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친 후에야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48세에 남편이 수운판관이 되면서 평안도로 살림을 옮겼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기록상에 아팠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예상된다. 그 때가 남편 이원수의 나이 51, 율곡이이의 나이 16세 때였다. 이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금강산에 들어가는 등의 방황을 했지만 외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았다. 사임당 사후 100년이 지났을 때, 보수적 성격을 띤 송시열이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이이를 낳았다며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했는데 그 이후로 신사임당은 화가나 예술가보다 율곡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신사임당이 가진 모성이 이미지는 18세기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임당은 어머니의 역할에서 나아가 효녀로서 부모님을 잘 섬겼던 깊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녀의 그림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인정을 받고 있을 만큼 뛰어난데다가, 시와 글씨까지 칭찬하며 감탄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술가였다. 남성의 시각으로 꾸며진 신사임당은 율곡이이의 어머니라는 인식이 가장 크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로 훌륭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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