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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호 청렴 편지> 오리 이원익
작성자 황간중 등록일 16.09.28 조회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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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충북교육」 청렴 편지 제79호 >


 오리 이원익(이원익) 1547~1634



  ‘오리(梧里) 대감’ 이원익은 15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족으로 조선 3대왕 태종의 열두 번째 아들 익녕 군의 4대손이었다. 그러나 이원익의 집안은 곤궁했다. 왕의 4대손까지는 벼슬을 못하는 것이 당시의 국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원익 대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1564년 이원익은 18세에 과거에 응시하며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때 함께 합격한 이가 열한 살 연상의 율곡 이이였다. 과거에서 맺은 인연으로 율곡은 늘 이원익을 높이 평가했다. 과거 급제이후 이원익은 성균관 유생을 거쳐 벼슬에 나가 승승장구하게 된다. 사간원 홍문관을 등을 거쳐 1583년에는 우부승지에 올랐다.

 이원익이 안주목사 시절에는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조정에 양곡 1만여 석을 청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어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려 근무도 연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이 제도는 이후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뽕나무로 생계를 이었다는 전설에서 힌트를 얻어 백성들에게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게 하여 백성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러한 일화로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부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위기에서 조선을 구한 대표적인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순신 장군이다. 이러한 이순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천거하고 계속 후원해준 사람이 류성룡과 더불어 이원익이었다. 류성룡과 이원익은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옹호하여 마침내 그가 나라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류성룡과 이원익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가 재미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이는 류성룡은 똑똑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이원익은 바르고 착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나라를 생각하고, 인물을 볼 줄 아는 안목은 같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원익은 선조 대에 이어 다시 광해군 때도 영의정이 되었다. 실무와 경륜이 뛰어난 이원이근 신임 왕 광해군이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이원익의 또 다른 큰 업적은 민생을 돌본 것이다. 전란 이전부터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가혹한 세금과 불합리한 제도때문이었다. 이원익은 세금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세금을 쌀로 통일하자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대동법(大同法)이다.

나무가 귀하고 쌀이 천해서 공물을 쌀로 통일하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 선조 실록 중

 또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키자 이를 반대하다 귀양살이를 했고, 인조반정이 성공했을 때 광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반정공신들의 주장에 굴하지 않고 그는 끝끝내 자신의 소신을 주장했고, 임금 인조도 결국 이원익의 뜻에 따라 광해군을 죽이지 않았다. 인조는 이원익에게 광해군 시절 부정을 저지른 권들에 대한 처분을 명령한다.   이 소식을 듣고 한 고관의 첩이 구슬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꽃신을 이원익 측실에게 선물하면서 남편의 구명을 부탁했다. 이를 알게 된 이원익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이런 것을 갖게 하고서 어찌 그 임금이 망하지 않겠으며, 백성들이 굶어 주는 마당에 첩에게 이런 신을 신게 하고서 그 사람이 어찌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 고관에게 엄한 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원익의 강직함과 청렴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40년 정승을 지낸 사람의 거처치고는 단출하기 짝이 없는 집에 담긴 사연이 각별하다. 이원익이 은퇴하자 인조는 그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충격에 빠졌다. 이원익이 다 쓰러져가는 초가에 살면서 돗자리를 짜 내다팔면서 생계를 잇는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보고들 받은 인조는 “40년 정승이 집 한 칸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이원익에게 집을 지어주라고 하교했다. 이런 사연을 가졌지만 이원익은 이 집의 하사를 네 번이나 거절했다. 이에 인조는 백성과 신하들의 본보기로 삼겠다며 거듭 하사했고, 결국 이원익은 임금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들였다. 이와 더불어 이원익이 공신 책봉이 되고 나서 선조가 “당신이 눈을 들어 보이는 땅은 다 주겠다”고 하자 바늘을 들어 바늘구멍을 통해 보이는 땅만 가졌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그는 청렴결백했다.

또 하나, 이원익 생애의 정점을 볼 수 있는 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의 친필 유서다. 이원익은 유서에서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후하게 장사 지내지 말고 다만 수의와 연금으로 시체를 싸도록 하라고 말이다. 이는 끝까지 청렴하고자 했던 이원익의 유산이자 높은 정신이었다.

- 학자의 고향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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