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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주제 탐구 보고서: 에도 막부가 멸망한 이유(作 박0수)
작성자 박민수 등록일 17.07.15 조회수 313

                                          <에도 막부가 멸망한 이유>                        30114 박0수


I . 서론

현재 일본의 전신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세워진 에도 막부(江戶幕府)이다. 이에야스는 막부를 세운 이후 1615년에 도요토미 가문의 거성인 오사카로 쳐들어가 두 번의 전투끝에(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을 말함) 그 당주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와 그 어미 요도도노를 자진케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면서 막부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고 막부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친족 다이묘인 고산케(御三家, 이에야스의 9남, 10남, 11남이 분가하여 각각 오와리 도쿠가와 분가, 키이(키슈) 도쿠가와 분가, 미토 도쿠가와 분가를 형성했다. 고산케는 그들을 통틀어서 이르는 용어이다)를 만들어 쇼군가에서 쇼군 부재시에 고산케 3개 가문중에서 쇼군을 이어나가도록 하였다. 이어 3대 쇼군 이에미츠 치세에는 산킨코타이 제도(참근교대제, 參勤交代)를 의무화하였으며 많은 다이묘들을 개역하고, 여러 토목공사를 다이묘들에게 분담하였다. 이후 4대 이에츠나(德川家綱) 치세에는 다이묘들의 제약을 풀어주었고, 막부가 지방 번을 통제하는 중앙집권체제와 다이묘들이 지방을 자체적으로 다스리는 지방 분권제가 공존하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책들로 인해 막부가 번(영주가 다스리는 영지. 일본은 번, 중국은 번진이라 지칭하였음)을 통제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막번 체제의 확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에도 막부는 망했을까? 필자는 이런 내용을 탐구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 막부는 쿠로후네 사건(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해군이 일본으로 와서 막부에게 개항을 요구한 사건으로 일본은 결국 개항하게 된다)으로 개항되어서 망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생각은 교과서적인 정답이다. 막부는 개항에 대한 양이론자들의 반발로 인해 망한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더많은 배경,막부라는 중앙권력의 약화 과정이나 경제적인 약화등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부분들을 통시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E.H carr(1892~ 1982)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 '왜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오로지 하나의 원인만을 제시한 수험생은 운이 좋아야 C학점을 받을 것이다. 역사가는 여러가지 원인을 연구한다. 만일 그가 볼셰비키 혁명의 원인을 고찰한 필요가 있다면, 그는 러시아의 잇따른 군사적 패배, 전쟁의 압박에 따른 러시아 경제의 붕괴, 볼셰비키의 효과적인 선동, 차르 정부가 농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빈곤하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가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지대로 몰려든 것, 레닌은 결심이 서 있었으나 반대편 쪽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등등을 거론할 것이다 ㅡ요컨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인적 원인 및 장기적 원인과 단기적 원인을 주워 모을것이다."   -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그 호기심을 통해 탐구하면서 궁금증을 충족시켜나가며 지식이 함께 진보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학생이라 전문적인 연구를 하기에는 미숙하고 이 주제와 관련된 지식들도 관련 서적, 지식백과, 역사 블로거, 카페글을 보면서 충족된 것. 하지만 는 이러한 부분에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미숙하나마 몇가지 배경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와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II. 본론

이 탐구 보고서의 핵심내용은 4가지로 줄거리에서 순차적으로 소개드리려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재해로 인한 막부의 재정 악화와 막부 대책의 부작용

    2. 지나친 문치주의로 인한 군사력 약화와 막번 체제의 붕괴

    3. 쇼군권의 약화와 노중권의 강화(쇼군의 허수아비화)

    4. 흑선내항으로 인한 막부의 위신 추락과 웅번의 득세



1. 자연재해로 인한 막부의 재정 악화

'겐로쿠 시대의 평안과 이면'

에도 막부와 이전 막부의 큰 차이는 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 청나라와 독점적으로 무역하였고, 주요 도시인 교토, 오사카등을 막부 직할령으로 두어 조카마치를 설치하여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이는 상공업자인 조닌의 부상을 말한다. 상공업자인 조닌이 부상하면서 막부나 다이묘, 무사들이 조닌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조닌은 에도 막부내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조닌이 부상하면서 자연히 막부의 재력도 증가했다. 


그런데 칸에이 대기근과 1657년 에도성 대화재(메이레키 대화재,明曆大火)로 인하여 에도의 70%가 불에 타고, 10만여명이 죽거나 다치면서 막부의 재정상태는 악화되었다. 하지만 아이즈 번주 호시나 마사유키(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자이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다)를 비롯한 막부 관료들이 동분서주하면서 수습하였고, 1688년부터 1704년까지의 겐로쿠 시대가 되면서 일본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맞게 된다.


잠시 겐로쿠 시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겐로쿠 시대는 막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재임:1680~1709, 德川綱吉)의 치세로 앞에 서술되있듯이 '일본 최고의 호황기'이다. 막부는 병농분리 정책과 개간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지조사를 통해 촌락을 재배치하면서 1603년 1200만명이었던 인구가 겐로쿠 시대를 거치면서 3100만명으로 증가했고, 17세기초 약 160만 정보였던 경지 면적이 18세기 초에 약 290만 정보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alsn76/220524744226)


하지만 츠나요시의 치세에는 그만큼 실정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95년에 화폐주조령으로 생산한 겐로쿠 금은(元綠金銀)이다. 이때에는 막부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이는 광산 수입의 감소에서 기인했다) 금, 은화의 순도를 낮추어 악화가 주조되었고, 물가 상승이 일어나면서 결국 실물경제를 장악했던 조닌들이 득세, 이후 막부 경제는 상인들이 좌지우지하게 된다


1716년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徳川家継)가 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직계 도쿠가와 가문이 단절되자, 초대 쇼군인 이에야스의 유명에 따라 고산케에서 쇼군을 옹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상속 룰에 따라 키슈 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무네(쇼군:1716~1745, 오고쇼: 1745~1751, 德川吉宗)가 쇼군으로 옹립된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享保改革) 그 한계'

요시무네는 막부의 재정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이묘들이 참근할때 정기적으로 쌀을 납부하게 하였고, 대신 1년이었던 참근 기간을 몇 개월 감소시켜 주었다(아게마이 제도, 上米). 또한 공직자들의 부정을 철저히 적발하고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일정액의 연공미를 징수하는 정면법() 실시해 수입안정을 도모했고, 막부 관료들에게도 쌀을 납부하게 하여 미곡 납부량을 늘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농업을 장려했다.이어 고구마와 감자를 재배하였는데이는 후일 대기근이 일어났을  심각한 사태로 번지는 것을 막게 했다이러한 노력등으로 막부 재정은 적자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는데역사에서는 이를 교호 개혁(享保改革)이라고 부른다


교호 개혁을 통해 막부의 경제적 위기는 단기적으로 일단락 되었지만교호 개혁에서도 심각한 한계점이 있었다그것은 중농억상 정책이었다무사들에게 검약령을 반포하여 상품 경제를 쇠퇴시켰고무사들이 조닌들에게 빌린 부채를 탕감하여 상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이는 에도 시대 상업을 침체시키는 악영향을 끼친다.


2. 연이은 개혁의 실패

'대기근과 중상주의의 부활(다누마의 개혁)'

1760년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재임:1760~1786)가 쇼군에 취임했다. 그는 어릴 때 조부인 요시무네의 총애를 받았고, 요시무네는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 재임:1745~1760)가 여색에 빠지고 문무가 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하루에게 쇼군 직을 상속시키기 위해 쇼군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에서도 강희제가 손자 건륭제의 능력을 총애하여 징검다리 형식으로 아들 옹정제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시게가 취임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붙인 한 사람이 등장한다. 다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 그는 측용인(側用人)이라는 직책을 겸하면서 막부의 실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에하루가 쇼군이 되면서 막부의 노중(老中)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교호 개혁의 효과는 점점 떨어져갔고, 쌀값이 하락하면서 막부는 큰 위기에 빠졌다. 이에 다누마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상공업을 활발히하여 이 사태를 타개하고자 했다. 각지에서 발전하고 있던 상품 생산과 유통이 가져오는 이익에 착안하여이를 막부 재정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이용했다오키쓰구는 우선 재원을 적극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대규모 신전개발을 계획하고 오사카에도 거상들을 끌어들여  사업을 추진하였다  ·  · 황동 · 인삼 등의 특산물을 전매제로 하여 상인에게 전매권을 주고 대신 영업세를 징수했을  아니라 새로운 독점동업조합의 결성을 공인해 주는 대가로도 영업세를 걷어 들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사 다이제스트100' 인용).


그러나 그는 상업 자본의 힘이 커지는 것을 허용하였고, 뇌물로 인하여 사회가 문란해졌으며, 덴메이 대기근이 덮쳐 막부와 지방 번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다누마에 대한 비판이 점점 커졌고, 그를 지지하던 쇼군 이에하루가 1786년에 서거하면서 그의 장례기간에 실각했다. 그리고 그는 사실상 칩거 명령을 받고 그의 영지는 두 차례나 감봉되었다. 다누마는 덴메이 8년(1788)에 서거했다.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과 중농억상'

이에하루가 서거하고 다누마가 실각하자, 새로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쇼군 재임:1786~1837, 오고쇼: 1837~1841)는 다누마 오키츠구를 '수뢰 정치'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던 무츠국 시라카와번주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1758~1829)를 노중(老中)에 임명했다. 그는 근검절약의 대명사로, 덴메이 대기근 시기에 자신이 직접 검소하게 사는 것을 모범으로 보이고, 구휼대책을 시행하여 그의 영지인 시라카와 번에서는 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다누마 파벌을 숙청하고 '간세이 개혁'을 시행했다. '간세이 개혁'을 요약하면 중농억상 정책(중상주의 정책 폐지), 이권과 수뢰의 정치 문화 일소(다누마파 숙청), 성리학에 근거한 중농주의 정책 장려, 근검절약 풍조였다.

사다노부는 다누마가 거상들과 짜고 독과점을 묵인하여 물가가 폭등된 것을 보면서 화폐 주조 정지, 동업조합의 해산을 시행하면서 상공업을 억눌렀다. 반면 농민의 부역을 줄이고, 개간과 치수 사업을 장려했으며, 전국적으로 곡식을 비축하는 것을 장려하는 등(1791)의 중농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부패와 뇌물이 사회에 만연해지자, 유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중시하여 전국적으로 번쿄(가신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 한코라고도 부름)를 증설했다. 그러나 이런 사다노부의 정치는 성리학에 근거한 경직된 정치의 일면도 있었다. 하야시 시헤이가 '해국병담'을 저술해 서구 열강들이 침공해 올 수 있다고  경고하자,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며 처벌했으며, 난학을 억눌르면서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불러왔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노부의 깨끗함에 물고기도 살 수 없어, 차라리 혼탁했던 다누마가 그립구나"라고 한탄했다('[MT교육 오늘의 역사] 1829년 오늘 에도 막부의 로주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타계').


도몬 후유지의 에도 시대 우에스기 가문의 개혁과정을 나타낸 소설인 '불씨'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다른 지역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세이가샤 무리들은(소설 내 개혁파) 다음과 같이 분석해 놓고 있었다.

(중략)

여섯째, 개혁을 추진하는 관료는 전부 명문출신의 상위자로서 부하에 대하여 지시 명령의 방법으로 일관하며 하급자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거나 동정도 하지 않은 점 등등

정책적으로는 대부분의 개혁이 중농천상주의를 채택하여 번민에게 근검절약만을 요구한 점에 주목하여 특히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세이가샤파는 지적하고 있었다." 

간세이 개혁과 뒤에 나오는 천보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지배층들이 하위 계층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대로 밀어부쳐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사다노부는 1793년 일왕의 생부를 상왕으로 추존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당시 쇼군 이에나리의 생부가 쇼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쇼군의 미움을 받아 실각하고 자신의 번에서 여생을 보냈다.






'천보 개혁의 실패와 웅번의 대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학과 국학에 대한 비판이 커졌고, 양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의 문화를 '가세이 문화(化政)'라고 한다. 이런 새로운 풍조의 문화는 이양선의 출몰이 심해지면서 점점 범위가 커져서 개국론자들을 양산했다. 그러자 막부에서는 이양선에 대해서 강경 정책을 시행하고(이국선 격퇴령, 1825), 1837년 미국의 모리슨 호를 공격하여 퇴각시켰으며, 개화론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런 강경한 기조가 바뀐 것은 1842년 청나라가 영국에게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이에 막부는 조선과 같이 이양선에 대해 식료품을 주며 타이르고 돌려보내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신수급여령, 1842).


1833년부터 천보 대기근이 일어나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반란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에서 반란은 무사들까지 가세했다(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1837). 

이 반란은 막부군이 아주 힘겹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는 막부의 군사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막부는 서둘러 대책을 수립했는데, 그 대책은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으로 회귀하자는 것이었다(농업중시+ 유학 중시). 천보의 개혁은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실패했고,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중앙정부가 실패했다면 지방정부인 번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에도 막부는 3대 이에미츠 치세만 해도 다이묘들을 개역하는 것과 같이 힘으로 다스리는 무단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구마모토 번주 가토 타다히로의 개역이 대표적인 예시). 하지만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의 치세가 되어 막부 전복 음모인 케이안의 변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막부의 정책 방향은 온건적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이후에도 번들은 참근교대 비용, 막부의 잦은 대규모 토목공사 참여, 대기근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막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쇼군이 허수아비가 되면서 노중들과 측용인들의 정권 다툼이 심해졌고, 이로 인해 지방 번들의 도움 요청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니 지방 번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나 서남쪽 지방의 4개 번인 조슈, 사쓰마, 토사, 히젠 번은 막부와 달리 서양 문물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개혁에 성공했다. 다른 번들은 막부와 똑같이 유학 중시, 중농억상 정책을 펼칠 때 이들은 번 주도로 특산품 무역으로 돈을 벌어 그것으로 서양식 군비를 갖추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금융업과 유통업을 발달시키는 등의 중상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여 이러한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는 중상주의 정책에서 중농억상 정책으로 매번 바뀌었던 막부의 정책과 달랐다.


이러한 웅번들은 막부의 정책을 매우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사건을 통해 그것이 표면화 되었다.







3. 개항과 막부타도-보신전쟁으로 인한 막부의 종말

'막부의 개항과 혼란'

1853년 이양선 한 척이 막부 해안에서 대포를 들이밀고 개항을 요구했다. 이들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끈 병력들로, 미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간 지점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개항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이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당시 막부는 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재임:1837~1853)가 서거하여 나라가 뒤숭숭할 때였고, 막부는 페리 제독에게 내년에 다시 와달라고 요청하여 미군 함대를 돌려 보냈다.


1년 후인 1854년에 페리 제독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다시 재통상을 요구했다. 막부의 1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재임:1853~1858)는 병약하였고, 막부의 실권은 중신들이 잡고 있었다. 결국 중신인 노중수좌 아베 마사히로의 주관으로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근대화의 시기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기존 막부에 불만이 있었던 서남쪽 4개번들이 막부를 타도할 좋은 구실을 주었고, 그들은 양이파가 되어 개국파인 막부를 맹비난하였다. 그런데 1858년,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중국이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 같은 해에 미국이 새로운 조약을 맺자고 강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 원로인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적으로 통상에 조인하자, 남부의 4개번을 비롯한 양이파들은 반발하였다. 그러나 웅번들은 막부에게 대항할 힘이 부족하였고, 막부는 1858년 사쓰마, 조슈의 존왕양이파 100명을 참수했다(안세이의 대옥, 1858). 격분한 존왕양이파중 일부는 1860년에 에도의 사쿠라다문을 지나고 있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암살해버렸고(사쿠라다문의 변, 1860), 막부에 도전장을 던졌다. 


'막부와 웅번의 충돌'

이러한 상황에서 조슈보다 온건파였던 사쓰마는 당시 고메이 덴노를 등에 엎고 막부와 타협하기로 했는데, 사쓰마에서 영국인을 베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영국은 군대를 이끌고 사쓰마를 공격하여 사쓰마는 크게 패했고, 서양 문물의 중요성을 몸으로 체감한 사쓰마는 양이에서 개국으로 선회하였다(사쓰에이 전쟁, 1863). 그동안 조슈 번은 사쓰마 대신 덴노를 등에 엎고 양이정책을 시행하려 했으나,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미국 상선에 대포를 쏜 것으로 인해 미국의 보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개국으로 선회하였다(시모노세키 전쟁, 1863).


막부는 다시 웅번들을 억누르기 위해 웅번중 하나인 사쓰마와 손잡고 조슈의 군대가 장악한 교토를 습격하여 조슈 군을 몰아내고 사쓰마는 조정의 칙명을 받아 조슈를 역적으로 만들었다(금문의 변, 1863). 그리고 막부군은 그 기세로 조슈를 향해 쳐들어갔고, 존왕파들은 산 속이나 다른 지방으로 도피하였으며, 조슈는 항복했다(1차 조슈정벌, 1864). 


그런데 막부군이 물러나자마자 존왕파들이 조슈를 다시 장악하더니 막부 타도를 외쳤다. 이에 막부군은 다시 재침공을 감행하였는데, 조슈 번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 번과 다시 동맹을 맺고 막부에 대항했다(삿쵸동맹,1866). 막부군은 조슈-사쓰마 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했고, 설상가상으로 14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모치(재임:1858~1866)가 1866년 7월 20일에 오사카 성에서 사망하면서 2차 조슈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막부군은 일개 번의 군대보다 허약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게 되어 막부의 위신은 추락할 곳이 없을정도로 추락했다.


'왕정복고와 보신전쟁- 막부의 멸망'

사카모토 료마는 삿쵸동맹과 막부에게 한가지 안을 제안했다. 막부를 폐지하되, 귀족의회를 만들어서 도쿠가와 가문을 귀족의회 의장으로 삼아 주도권을 넘겨주자는 것이었다. 료마는 얼마 후에 암살당하지만 막부는 료마의 안을 수용하였고,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재임:1867~1868)는 덴노가 있던 교토로 올라가 1867년 10월 14일에 막부의 모든 국정 운영권을 덴노에게 반환한다고 서약했다(대정봉환,1867).


그러나 삿쵸 동맹은 이대로 가면 도쿠가와 가문이 의회를 장악하여 다시 막부를 부활시키거나 그들이 기득권을 계속 누리게 된다는 것을 우려했고, 메이지 덴노를 통해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모든 직책을 내려놓으라고 명했다. 요시노부는 삿쵸동맹의 계략임을 알아챘고, 그대로 가만히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친막부파인 아이즈 번과 막부군대, 신선조(막부 보호를 위한 무사무리들)등을 동원하여 사쓰마 정벌을 선포했다. 이것이 보신전쟁의 시작이다.


막부군 1만 5천 병력은 정부군(친 덴노군대)이 점령한 교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바와 후시미 지방을 통해 교토로 진공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저항이 거셌고, 무장과 전략에서 정부군이 우위를 장악하여 막부군은 패주했다(토바- 후시미 전투,1868). 이어 막부군은 조정의 적으로 지명되고(특히 덴노가 신격화된 당시에는 효과가 컸다.) 이어진 전투에서 계속 패전하면서 토카이도를 따라 에도로 패주했다.


정부군이 에도까지 밀고 들어오자, 막부군은 혼란에 빠졌다. 강경하게 저항할 것인지, 아니면 항복할 것인지로 중신들의 의견도 갈라졌다. 강경파는 관서의 여러 다이묘들이 항복하긴 했지만, 센다이 번, 아이즈 번과 같은 관동의 다이묘들은 아직까지 막부를 따르고 있고(실제로 막부가 항복한 이후에 이들은 '오우레츠 열번 동맹'을 맺어 정부군에 대항한다) 이로 인해 군사력으로는 정부군과 비등비등하니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복파들은 총지휘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덴노의 칙명으로 인해 조정의 적으로 선포되있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고, 관동의 번들도 언제 배반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여 항복할 것을 권했다. 이에 요시노부는 에도성을 무혈개성할 것을 결심하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군의 총지휘관으로 나중에 서남전쟁으로 정부군과 대항함)와 협상하여 항복하고 낙향했다.


항복에 반대한 막부 가신들은 제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친 막부번들의 연합인 오우레츠 열번동맹에도 참여하고, 훗카이도에서 에조 공화국을 세워 저항해보지만 정부군이 차례차례 진압하면서 265년간 일본을 지배해왔던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다. 









III .결론

결론으로서 이 글의 큰 내용을 잡아보고 끝맺으려고 한다. '에도막부는 왜 망했는가?'

본인은 에도 막부가 망하게 된 최초의 원인으로 사치 풍조와 토목공사라고 생각한다.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부터 심해진 사치 풍조와 잦은 토목공사, 겐로쿠 금은을 통한 통화 정책의 혼란은 막부 경제 위기의 시작점이었다. 후대 쇼군으로 이어지면서 사치 풍조와 경제 위기가 심화되다가 새로운 방계 쇼군인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전대부터 이어져온 중상주의 정책이 아닌 중농주의 정책을 들고 왔다. 중농주의 정책과 함께 유학을 강조하고 근검절약 풍조를 중시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온 것이다.


그러나 후대 쇼군들은 그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한계를 보였다. 이후 막부는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다가 경제가 안좋아지면 중농억상으로 상공업에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번 반복했다. 농업뿐만이 아니라 상공업도 막부 경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막부의 수뇌부들은 간과한 것이다(요시무네도 이렇게까지 상공업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농업은 그 해 수확량 따라 경제가 좌우된다. 즉, 대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그 해 쌀 생산량이 예상보다 못미친다면 쌀값은 폭등할 것이고, 농민들의 잇키(농민반란)가 여러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소설 '불씨'의 내용을 한 번 더 인용하겠다.

"당시는 물물교환 시대가 아니었다. 나이에 따라 몇 석 또는 부양가족에 따라 몇 석과 같이 무사의 급여는 쌀에 기초를 두고 있었지만 세상은 모두 화폐로 운영되고 있었다. 파 한단, 두부 한 모 사는데도 돈이 있어야만 했다. 쌀을 가지고 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되돌려질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었다. 개간이나 가공 작업에 참여한 무사와 그 가족은 우선 그러한 경제구조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중농천상주의>가 얼마나 낡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반면 다른 웅번들은 달랐다. 그들은 상공업의 중요성을 느끼고 상공업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로 웅번들은 많은 돈을 얻게 되었고, 막부가 기피했던 서양의 무기들을 수입하여 군사력을 키웠다. 같은 시기 재정 악화와 더불어서 군사력이 약화되던 막부군과 대조적이었다. 이 차이는 개항 이후에도 이어져서 막부군이 서양 무기를 수용한 후에 치른 보신전쟁에서 막부군 1만 5천명이 무기 숙련도로 인하여 정부군 3천명에게 패주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 내내 막부군이 밀려서 에도 막부의 멸망을 초래했다.


요약하자면 사치 풍조와 지나친 토목 공사를 하다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중농주의적 개혁으로 단기적 위기를 타개했다. 그러나 후대 쇼군들이 중농주의 정책을 중농천상으로 악용하였고, 막부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중상주의를 중심으로 웅번이 발전했고, 개항 이후 그 웅번들에 의해 나라가 뒤집히게 되었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불씨 상권, 하권-作 도몬 후유지, 신한종합연구소

-동아시아사 교과서-비상교육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삼대(2000)

-일본근세사-作이계황,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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