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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를 읽고
작성자 여정숙 등록일 24.11.25 조회수 25

소년이 온다를 읽고

그날 밤 난 홑이불을 배에 감고 누워 일찍 잠든 척하고 있었지.

언제나처럼 야근을 하고 들어온 누나가, 언제나처럼 세면장에 상을 펴고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 소리가 들렸어. 씻고 이를 닦은 누나가 발뒤꿈치를 들고 들어와 창문으로 다가가는 옆모습을, 난 어둠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봤어. 모기향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하려던 누나는, 내가 창틀에 세워놓은 칠판지우개를 발견하고 웃었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 내어 한번 더.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헝겊 지우개를 한번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았지. 언제나처럼 나에게서 멀리 이불을 펴고 누웠다가,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잠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정말로 눈을 꼭 감았지. 누나가 내 이마를 한번, 뺨을 한번 쓰다듬곤 이부자리로 돌아갔어. 좀 전에 들렸던 웃음 소리가 어둠속에서 다시 들렸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내어 한번 더.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소년이 온다 2장 검은 숨

내가 이미 읽은 책이, 그것도 원서로 읽은 책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되는 경험을 다 해 보네요. 한강 작가님 덕분에. 이것이 바로 2024년의 일이니, 올해 어떤 글을 추천해야 한다면 절대 빠지면 안될 것 같아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2014년에 출간됐으니 십 년만에 세계적인 인정과 주목을 더욱 받게 된 이 책은, 저에게도 최근 십 년동안 읽은 것들 중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나름 이미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의 이야기라, 실제 증언들을 토대로 한 작가의 묘사가 사실적이다 못해 참혹해도, 새삼 분노와 전율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위에 내용, 그러니까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정대가 붙든, 삶의 의미와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억"이 서술된 대목이 탄식과 함께 책장을 멈추게 했지요. 이제 읽은 지 겨우 55쪽인데 말입니다.

왜 이런 아이가 죽어야 했을까? 아직 중학생인 정대를 누가 죽게 했을까?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학교 대신 공장에 다니던 정대 누나의 마음이 되어, 자는 척 눈 감은 얼굴을 사랑스럽게만 바라보는데, 순간 숨이 끊긴 동생의 눈 감은 얼굴로 디졸브 되는 철렁함을 한 점 마침표에서 몰아 느끼며, 미간을 구긴 채 책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이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게 하필 큰 글자 책이어서 가슴에 안은 책이 마치, 키가 작은 정대처럼 느껴지기 까지 했달까요. 그냥 미안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내가 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기에도 죄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다시 같이 아파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저는 그렇게 하려고요. 그것이 '젊은 세대가 광주 5.18항쟁에 대해 이해하는 관문이 되길 바란다'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니까요. 당장이 아니어도 좋아요. 여러분 또래인 동호와 정대가 등장인물이긴 해도, 여러가지 이유로 책이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도 꼭 해야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마음도 의미있다고 여기기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시길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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