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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숙제
작성자 용문중 등록일 09.04.24 조회수 254
1) 신분적 배경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7대 손으로 왕족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보학(譜學)에 능한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족보에 대한 교육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해방후 미군정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었던 버치가 이승만을 부르봉파로 평가한 것이나1) 그가 미국에서의 대학시절 왕족으로 행세한 것은 이러한 신분적 우월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구는 상민 출신으로 양반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는 양반이 되고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1926년 12월에 그가 이동녕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 취임 교섭을 받고 일단 사양한 이유로 첫째로 든 것이 자신 같은 미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일국의 수반이 된다는 것은 국가[임시정부]와 민족의 위신에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전통적 유교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 학문적 배경
두 사람 모두 서당교육을 받았으나 이승만은 10여 회의 과거 응시 끝에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자체가 폐지되자 유학을 과감히 버리고 배재학당에 입학, 일찌감치 선교사들을 통해 구미문화를 접하였다. 또한 미국에 건너가 죠지워싱턴대학[학사], 하버드대학[석사], 프린스턴대학[박사]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생활철학을 체득하였다.
김구는 풍수(風水)와 관상(觀相)을 공부하고 화서학파 계통의 유학자 고능선으로부터 유교경전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체득하였다.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상인을 군 장교로 간주하여 죽이고 수감되었을 때 감옥[인천감리서, 현재 내리교회 뒷편]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일종의 세계역사) 등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김구는 이승만과 달리 정규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근대개혁의 방법에 있어 이승만은 전통적인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구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취합을 주장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육의 균등을 특히 강조[1941, 대한민국건국강령]하였다. 

4) 가정환경
이승만은 6대 독자로 가족들의 극진한 애정 속에서 성장, 자기중심적 사고가 형성되었고 첫 부인[朴氏]과는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 학감(學監)을 하면서 이별하였다. 그 후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국인’ 프란체스카와 재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鳳秀, 아명은 泰山]이 미국에 와서 디프테리아에 걸려 객사하였다.
김구는 헌신적인 어머니와 호걸형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네 번에 걸친 파혼 끝에 ‘가까스로’ 결혼하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내와 두 명의 자녀[장녀 화경과 장남 仁]를 잃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두 사람 모두 불우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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