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통일안보 교육 자료 > - 학생 교육 자료 - 통일의 의미 통일은 다르게 표현하면 곧 분단의 극복이다. 그러나 통일이란 단순히 ‘분단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할 수는 없다. 21세기 지식 정보사회를 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그러한 복고적 통일은 이미 그 의의를 상실하였다.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분단 이전의 상태’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으며, 세대가 바뀌고 가치관도 새로워졌다. 통일은 결코 소극적 차원의 단순한 ‘재통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의 ‘새로운 통일’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통일은 민족의 앞날과 관련된 문제이다. 따라서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통일은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 등 우리 민족의 삶과 여러 측면을 미래의 새로운 상황과 접목시켜 하나의 민족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통일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세계적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겠다. 통일이 인류의 보편가치와 제도, 질서를 확장해 가는 과정이며 결과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통일의 상(像)은 자명해진다. 곧 통일이란 민족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복지,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민족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첫째, 지리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통일은 곧 국토의 통일이다. 우리 민족은 수 천년 동안 한반도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면서 살아왔다. 통일은 민족성원 모두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왕래하고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적 의미에서 국토는 불변적이지만, 생활권으로서 국토의 의미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 우리 강토는 남과 북의 온 겨레가 더불어 가꾸어 가야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통일은 국권의 단일화를 뜻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단일한 정치체제 속에서 살아왔다. 국가와 민족이 하나로 일치해서 살아온 장구한 역사에 비교하여 볼 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50여 년 분단역사는 결코 긴 것이 아니다. 남북 간에 단일한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통일의 중심과제가 되어야 한다. 셋째,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통일은 민족경제권의 통합을 뜻한다. 남과 북은 현재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나뉘어져 있고 경제생활권 또한 남북으로 단절되어 있다. 분단 이전에 우리 민족은 단일 경제권을 형성해 살아 왔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통합이 이루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민족의 공동 복리를 증진해 나가기 위한 경제권의 통합은 실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넷째,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통일은 국민의 통합을 뜻한다. 현재 남북한은 서로 다른 사회체제 아래 서로 다른 국민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된 조국에서 남북한 주민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해 나아가는 것 또한 중대한 과제이다. 다섯째,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통일은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같은 언어.같은 문화.같은 전통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남북 간의 동질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정체성마저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과 북은 함께 과거의 문화로 되돌아 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각자 현재의 문화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남과 북이 함께 민족전통 위에 서서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통일은 다면적인 의미의 통일을 지리적 분단.정치적 분단.민족적 분단으로 이어진 과정과 관련지어 단순화시킨다면 통일은 곧 국토도 하나(국토통일), 제도도 하나(정치적 통일), 민족도 하나(민족통일), 생활도 하나(경제.사회.문화적 통일)로 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일은 둘로 나누어진 국토와 제도, 민족이 모두 ‘참다운 하나’로 거듭날 때 그 목적과 내용이 완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2020년 통일 교육 홍보물) 조국 분단의 배경과 의미 통일을 왜 해야 하며 왜 필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분단되었고 그 분단의 성격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은 지리적, 정치적 그리고 민족적 차원의 3단계를 거치면서 고착화되고 심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지리적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소련은 미국이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의 조기항복을 예상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8월 8일 급히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그 이튿날부터 빠른 속도로 만주 전역에 이어 한반도에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오키나와 근해에 머물고 있던 미군으로서는 소련군의 급속한 남하와 일본의 조기 항복이라는 급박한 사태 속에서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접수하고 무장 해제를 위해 연합국끼리 지역분담 지침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서 실무작업을 맡은 미국의 ‘본 스틸’과 ‘러스크’ 두 대령은 38도선을 경계로 한 미국, 소련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건의하였다. 이 안은 미국 정부 차원에서 채택, 영. 중. 소 3국의 동의를 받아 일반명령 1호로 맥아더 사령부에 하달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의 분단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통치와 제2차 대전 종결과정에서 나타난 강대국 정치의 산물로서 소련의 야심과 이에 대응한 미국의 정책이 낳은국제형 분단’으로 일단 규정할 수 있다. 남북 분단의 근본적인 원인은 약소민족의 권익을 도외시한 강대국들의 자의적인 전후 처리과정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분단에 대한 책임을 바깥 세계에 대해서만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민족의 자주역량이 부족하여 국권을 빼앗겼고 이것이 국토분단의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으며 광복 이후에도 정치적 대립으로 분단을 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미. 영. 불. 소 등 4대국의 점령하에 놓였던 오스트리아는 좌우익 정치세력들이 제휴하여 외세의 분단시도를 저지하고 통일 국가를 유지했다. 소련의 치밀한 계획으로 대일 선전 포고와 함께 북한 지역에 진입,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들어와 1948년 9월9일 공산 정권을 출범 시켰다. 1.공산군의 남침 소련의 무기 공급과 지원으로 미리 남침 준비를 해 온 북한 공산 집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쳐들어 왔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13만 명의 병력을 투입한 북한군은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강릉 등 11개 지역에서 38 도선을 돌파하였다. 대한 민국 군군으로는 공산군의 우세한 화력과 장비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2. 북한군의 남침과 국군의 후퇴 1. 1950년 6월 25일 , 북한군은 갑자기 남한을 침략하였다. 2. 남한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3. 1950년 8월에는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 4.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북한군의 침략을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즉시 철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3. 유엔군의 지원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국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하고 북한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공산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한편 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4.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UN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UN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제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8월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5.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 국토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10월 25일,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전투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인해 전술(많은 수의 병력으로 희생을 무릅쓰고 공격을 되풀이하는 원시적인 전술)로 반격해 왔다. 다시 아군은50여 만 명의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아군 12만과 피난민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어 적은 계속 남진했으나, 아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적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아군이 한강을 넘어서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6. 휴전 협정(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후 현재가지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다. 3년 1개월의 전쟁으로 50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천만의 이산가족과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한 비극적 상황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다. 종전이 아닌 정전(휴전)이라는 분단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야할 것이다. 이번 ‘판문점’남북 평화 회담과 2018년 6월13일의 북미 회담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별첨1〕 < 통일 및 북한관련 웹사이트 > 주관 사이트 : 통일교육원 홈페이지(http://www.uniedu.go.kr) 통일부 www.unikorea.go.kr 북한자료센터 unibook.unikorea.go.kr 통일교육원 www.uniedu.go.kr
www.acdpu.go.kr 청와대 www.cwd.go.kr 국가정보원 www.nis.go.kr 외교통상부 www.mofat.go.kr 외교안보연구원 www.mofat.go.kr/korean/ifans 국방부 www.mnd.go.kr 대외경제정책연구원 www.kiep.go.kr
통일학연구소 www.onekorea.org 극동문제연구소 www.members.iworld.net/ifans 세종연구소 www.sejong.org 통일연구원 www.kinu.or.kr 한국발전연구원 www.hanbal.com
관동대 북한학과 www.kwandong.ac.kr/ ~unikorea/main.html 이화여대 북한연구협동과정 mm.ewha.ac.kr/~nk21 경기대 통일안보대학원 www.kyonggi.ac.kr/~gsreunif 경남대 북한대학원 ifes.kyungnam.ac.kr 한양대 통일정책연구소 www.dsr.hanyang.ac.kr/ lab/lab39.html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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