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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고전(출처:KBS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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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시
작성자 양승훈 등록일 17.03.02 조회수 67

嚆矢(효시)

오늘 31일은 삼일절입니다. 19193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날이지요.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잔인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석 달 이상 지속되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집회 천오백사십이회, 참가인원 200만 명 이상, 사망자 칠천오백구명 1,542, 참가 인원 2023,089, 사망자 7,509, 부상자 15,961, 체포된 인원만도 46,948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 효시(嚆矢)가 된 것이지요.

 

울릴 효 화살 시

 

이 말은 <장자(莊子)> 재유편(在宥篇)에 나오는 이 말은 옛날에 전쟁을 시작할 때 소리가 나는 화살을 쏘아 올려 신호 삼아 전투를 개시(開始)하는 신호로 삼았다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시초(始初)나 선례(先例)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어지는 많은 일들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먼저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와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이상적 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이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 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식민지 상태에 있던 아시아 각국의 민족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을 자극 하게 됩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총리이자 외교관, 혁명가였던 저우언라이는 1919년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부산에 도착, 경성(서울)으로 이동하면서 일기에 "일제에 강점당해 10년이 지난 조선이 이렇게 거족적 항일독립운동을 어떻게 해냈을까? 그 현장을 직접 봐야겠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느낀 감동을 중국 5.4운동 리더그룹에 전달했고 천두수(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등 베이징대 교수들도 3.1독립운동의 위대함을 학생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역설하였다고 합니다.

 셋째는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의 단일한 지도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어,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탄생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3·1운동의 이듬해인 192031일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주최한 제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안창호는 이렇게 연설합니다.

과거 일 년간 일인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많은 일의 시작을 알렸던 효시(嚆矢)가 된 3·1운동, 우리는 그 해 3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않고 잘 지켜나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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