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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배경
작성자 탄금중 등록일 09.04.27 조회수 165

625 전쟁의 배경


  남북 간에 6․25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벌써 50년이나 되어갑니다. 총성은 멎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폭발하듯이, 휴전의 상태에서 다시 전쟁 상태로 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지난 6․25 전쟁의 원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분단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6․25 전쟁이 일어난 구체적인 배경은 무엇일까요?


  먼저, 북한의 무력 적화 통일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주장한 통일 정책이 소위 ꡐ조국 해방 전쟁론ꡑ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에 가장 적절한 근거가 됩니다. ꡐ조국 해방 전쟁론ꡑ이란 북한을 기지로 삼아 무력으로 남한의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통일 정책과 소련의 적극적 지원 하에 군사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일관성이 결여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도 일부 작용하였습니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 D. G.)은 1950년 1월에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ꡐ애치슨 라인ꡑ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애치슨 선언은 북한의 남침 의욕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남침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였던 것입니다.

8․15 광복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1948년 남․북한에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각각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북한이 남침을 계획할 때 가장 우려한 것은 미군의 개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애치슨 선언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북한의 남침을 어느 정도 자극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의 조인과 함께 전쟁의 포성은 멎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전인 1948년의 분단이 비교적 유동적이고 잠정적인 분단이었다면 휴전 상태로 만들어진 1953년의 분단은 점차 고착되어 가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단의 고착화와 더불어 남․북한 사이의 분단 의식도 커져 갔습니다. 특히,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성과 잔인성을 동반하며 진행된 전쟁의 양상은 점령과 수복, 보복과 반보복,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증오감을 각인시키고 남․북한 체제의 분단 구조와 의식을 내면화시켜 갔습니다.


  상대방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 타도되어야 할 대상일 뿐 동족이라는 의식이 생겨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단의 의식은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체제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전쟁으로도 극복하지 못한 분단을 지금 현 시점에서 극복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 우리들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 것은 사실입니다만,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민족 대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그 상처를 승화하며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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