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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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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병국가옥(사적134호)
작성자 최재인 등록일 13.07.02 조회수 307
선병국가옥 사적 134호
 

선병국 가옥

민속자료134호 1984.1.10 지료 보은군 문화해설사 김헌수 HP; 010-5311-3929

이곳은 약 100년전 구한말 시대 선정훈 이란 분이 지은 한옥으로 지금은 선정훈의 아들 선병국 옹은 1989년에 돌아가시고 선병국옹의 아들 두형제가 사는데 큰아들 선민혁씨는 안채에 작은아들 선사혁씨는 사랑채에 살고 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선병국옹이 살고 계셨기에 선병국 가옥이라고 합니다.

이집을 지으신 선정훈 선생님은 보성 선씨로 전라도 고흥군에 서 대대로 살아오다 구한말 17살 때 이곳으로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오게된 동기는 선생님의 부친 선영홍 선생님이 꿈에 선인이 나타나 호서지방으로 이사를 하라는 선몽을 들은 후 부친의 뜻에 따라 유명한 풍수사를 대리고 호서지방 곳곳의 명당을 차자 다니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터를 잡아 집을 짓게 되었답니다.

 

명당 터

이터는 어떤 곳인가 하면 연화부수형(물위에 뜬 연꽃모양) 의 명당 터입니다. 이앞에 흐르는 천은 삼가천으로 속리산 제일봉에서 발원하여 만수계곡 서원계곡을 흘러 오다 두갈래로 나뉘어 이집 주위를 흘러 아래에서 합수되어 금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로 물 가운대있는 섬 형태입니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이든 물이든 직선보다 감싸안은 형태를 선호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안동 물도리동 하회마을입니다.

 

집안의 내력

이집 가문의 선대조는 높은 관직에 계시며 벼슬을 하였으나. 이집을 지을 당시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가 기울어 가는 시기이므로 선영흥공은 정치엔 뜻이없고 일직이 경제활동에 정진하여 대부호가 되었답니다.

이분은 여러척의 선박을 가지고 무역업을 하였는대 국내는 물론 국외 중국 일본까지 주로 건어물과 한약제, 소금,젓갈등 물품을 취급하였으며 국제 무역은 경남 통영과 제주항에서 출항을 하였다고 합니다.

선영홍 공께서는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이 선정훈 선생님 이시고 둘째는 전남 고흥에 게시며 셋째와 넷째는 이곳 한 집에 살다가 1930년 대 이 동네 새 집을 지어 살림나 살고 있는 데 동생들 두집도 현재 충청북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비석 비각

철비흥군 두원 ,정암,남량,남면 4개면 소작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여 소작료도 받지않고 땅도 가지게하여 잘 살게된 소작농들이 고마운 은혜를 잊지않기위하여 비석을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국도변에 새워있던것을 도로 확장 공사로 2004년 이곳으로 옮겨온 비석입니다.

하얀 비석 1927년에는 현재 이지방에 대기근이 들어 주민들이 굶주리게 되었는대 중국에서 곡식을 열차로 옥천까지 운송하고 트럭으로 다시 보은까지 실어날라 먾은 사람들을 구흘 하였답니다.

그 당시 굶주림을 면한 주민들이 고마은 뜻을 전하기 위하여 25번 국도 변에 세웠던 비석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것이 여기 하얀 비석 입니다.

그옆에 건물은 비각이 아니라 효열각이라고 하는 데 고종 29년 1892년 선영홍 공의 아버님 처흥 공께서 효자문을 경주김씨 어머님은 열녀문을 나라에서 받으시고 정려각을 고향에 세웠던 것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새운후 효자와 열녀의 앞자를 따서 효열각이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자선사업 교육사업

현 장안 면사무소와 속리초등학교 부지 수천평을 기부하였으며 순종황제가 돌아가셨을때 이미 망한 나라의 재정 부족으로 어려운바 선생님께서는 거금을 헌납 능지조성을 도와 드려 종친부로부터 비서승이란 벼슬 첨지를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답니다.

교육사업으로 인제양성을 위하여 관선정이란 사설 사당을 설립하여 1926년부터 1981년까지 약 25년간 운영 하여 105명을 배출하였다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입학을 하게되면 무상으로 침식을 제공하고 유능한 스승을 모셔놓고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업 내용은 유학경전을 중심으로 국사와 사문을 주로 교육하였으며 일제 시대이므로 배일 사상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이었답니다.

수업 기간은 5~6년 정도 끝나면 한학의 전문가가 되었는대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 금석학 및 한학의 최고 권위자로 대가였던 임창순 선생이 관성정 출신이다.

 

이집의 구조는

1904∼1914년까지 9년 8개월동안 지은 이집은 약 100년전에 지은집으로 숲까지 30.000평으로 집부지가 3.800평이대 지금은 군부대 부지 7.000평을 제외한 23.000평입니다.

이중으로 쌓은 돌담은 800m로 쌓는대 3년 6개월이 걸렸답니다.

건축물은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일꾼들의 공간인 행랑채, 조상 신주를 모시는 사당과 솟을 대문이 있다.

안채는 보은의 어머니 산이라는 구병산을(일명 대모산) 배산으로 서향이며 사랑채는 옥녀봉(일명 보습산)을 배산으로 남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집의 구조는 특이하게 H 자형(혹은 工 자형) 으로 처음에는 134칸을 지었으나 건물 일부가 무너지고 현재는 110칸이 남았습니다.

엤날 조선 시대 국법에는 민가를 100칸이상 지을수 없었으며 기등도 원 기둥이 아닌 사각 기둥을 써야 했다

이는 조선의 사직이 기울고 왕권이 악화되어 나라에서 민가의 건축까지 규제할 수 있는 힘을 잃어 그 당시 능력있는 사람들은 국법을 초월하여 지을수 있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99칸 선병국 가옥이라 하였답니다.

또한 이집을 지은 대목은 경복궁을 지은 목수가 일을 하였다고 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에는 좌측에는 남자 머슴들의 거처인 남자 행랑채가 있었고 우측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묵어가는 과객실이 있었으며 안채 앞에는 디딜방아와 연자 방앗간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리지고 없습니다. 또 중문 앞에는 연못이 있어 연못 다리를 건너 사랑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답니다.

 

주항색 양철지붕

이 건물은 화장실인데 현재 사랑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양철 지붕은 처음 이집을 지을 때 사용한 자재인데 양철은 100년이 못가 새로 보수한 것으로 문화재라 원형대로 그 당시 모습 따라 양철을 사용하여 보수하였습니다.

 

한옥가옥

안채와 사랑채는 H자 형으로 32칸이고 사랑채는 원기둥을 사용했고 안채는 원기둥과 사각 기둥 두가지를 사용하였다.

원은 태양을 상징한다 하여 원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만 사용할수 있었으나 이집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이는 나라가 어지러웠던 구한말 시대라 민가에까지 손을 댈 여력이 부족했다한다.

건물 기단을 봅니다.

사랑채는 기단이 3단 (홀수) 기둥(하늘) 이며 양이고

안채는 기단이 2단 (짝수) 기둥은 사각(땅) 음을 상징하여 건축함

안채에서 사랑채로 가는 중문의 빗장도 사랑채의 남정내가 함부로 출입할수 없도록 안채에서 문을 열어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ㄷ 자집은 여자들의 행랑채와 곳간채로 겸하고 있는 데 지금은 고시생들의 공부방으로 쓰고 있습니다.

사당

6칸 짜리 사당과 3칸짜리 재수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사당은 특이하게 사당과 재수채 사이에 ㄱ 자 회항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붕은 양철로 되어 있다.

사당은 사대부가가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율곡 이이 선생께서 집안에 사당을 설치한 이래로 양반가 및 후에는 시민들까지 널리 보편화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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