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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의 유래와 세종대왕의 업적
작성자 전신용 등록일 08.10.09 조회수 292
 한글날이나 우리 글, 그리고 창제자인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당일에는 '한글날의 유래와 세종대왕의 업적'을 연대별로 요약해서 그 발자취를 살펴보고 다시 한번 더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세종대왕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창제의 취지, 그리고 한글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길 바랍니다.


     2. 한글날의 유래와 재정 과정    

 
   "한글날"은 세종대왕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날입니다. 즉 우리글, 한글을 기리기 위하여 법으로 제정한 날입니다. 한글날을 처음 제정한 때는, 불행하게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있던 지난 1926년입니다.

  
지금은 "한글학회"로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는 민간단체가 있습니다. 즉 1947년,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펴냈으며, '한글의 연구, 통일, 발전을 목적 '으로 1921년 처음 설립된 민간 학술단체가 바로 "조선어 연구회"입니다.

 세종 28년 9월 상순에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

   이 조선어연구회에서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처음으로 '가갸날'이라 이름해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도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에 기록되어 있는 '한글이 반포된 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이는 한글이 조선 세종 28년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록에 따라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였으며, '서기 1446년 10월 9일'을 반포의 날로 확정하여 기리게 된 것입니다.


    1926년 음력 9월 29일(11월 4일), '가갸날' 선포(한글 반포 8회갑=480돌).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이름을 고침.
    1931년,
음력으로 기념한 '한글날'을 양력 10월 29일로 정하여 기념함.
    1934년, 그레고리오력으로 고쳐 10월 28일로 정하여 기념함.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
                    정인지() 서문에 반포일이 9월 '상한()'으로 나타남.
    1945년 훈민정음 원본에 따라, 반포일인 9월 상한을 양력으로 환산,
                                         1446년 10월 9일을 반포의 날로 확정함.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맞이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함.
    1981년 '한글날' 기념식이 정부(서울시) 주관으로 바뀜(535돌).
    1982년 '한글날' 기념식을 서울시에서 문화공보부 주관으로 함.
    1990년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함.
    1991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것에 대해 이를 되살리는 것보다는
                         격을 높여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자는 운동을 벌임.
    2008년 10월 9일, 현재 562돌 한글날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가 진행 중.
                            ‘한글 손 글씨, 거리를 물들이다’, 휴대 전화 쪽글 자랑 한마당,
                            UCC-내가 만든 한글사랑 작품잔치,
                            전국 국어대회-황금사전 선발대회,
                            한글 글꼴디자인 공모전, 외국인 한글 글씨 쓰기 대회 등


     2.  세종대왕의 업적과 발자취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 4대 왕(재위 1418~50)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무척 깁니다.

   이도 세종은 1397년(1세) 음력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며, 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입니다.

  
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었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같은 해인 1408년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습니다.

▲ 이도, 세종 대왕의 영정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함.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소헌왕후와 결혼함.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됨.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됨.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름.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함.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함.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함.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함.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펴내 전국에 배포함.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함.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침.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움.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함.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함.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함.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함.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함.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함.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인쇄업무 담당기관)"를 설치함.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듬.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야인(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함.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함.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정하여 실시함.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함.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함.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 "언문 28자"를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함.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지음.
   1446년(50세, 세종 28년) 음력 9월,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함.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함.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함.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함.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함.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함.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3월 16일), 승하함.



   위와 같이, 우리말의 유래와 세종대왕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습니다. 훈민정음의 반포에서 비롯되어 "한글날"로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세종대왕의 연대별 업적과 그 문화유산은 다방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 놀랍기만 합니다.

   그 발자취는 새로운 문명의 생산이라 평가할 수 있는 다방면에서의 문화 발명이자 문화혁명입니다. 특히 "우리말, 우리글의 창제"는 현재의 IT 기술과 그 혁명적인 보급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혁신적인 문화창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4일(토)에 집현전의 옛 터인 경복궁 수정전 앞에서, 문화제육관광부의 한글 주간 선포식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적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글 관련 서적과 각종 자료들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는 정부의 재정지원과 인식 부족 때문이며, 우리의 관심 부족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한글날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곳곳에서 진행됩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앞에 가시면, 서울시가 주관하는 훈민정음 반포 재현’ 행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서울역사박물관과 강북삼성병원 백범기념실, 한글학회 등 20개 기관에서 "문화재 그리기대회", "새문길 한마당", "거리축제" 등 다채로운 공연과 행사가 진행됩니다. 가능하다면, 이런 재현의례와 체험행사에 참여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http://chohamuseum.net/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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