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 이지수 <옥천삼양초 사서교사> 벌써 1월의 끝자락에 와 있다. 날씨도 여전히 들쭉날쭉하며 어제는 잠잠했던 추위가 오늘은 다시 시작된다.
매서운 바람에 몸이 움츠러질수록 따스한 이부자리와 매운 맛이 생각날 때 그와 동등하게 잔잔한 따뜻한 감동으로 추위를 다소 잊게 해줄 ‘빨래터’(이경자·문이당)를 만났다. 지난 12월 겨울방학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는데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눈에 익은 표지의 투박한 질감의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소소한 일상의 빨래터의 모습을 잘 담아낸 그림이 삽화로 되어 있는 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여럿이 빨래하는 이미지는 개인적으로 내게 참 익숙한 광경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마을의 공동빨래터나 마중물을 부어야 나오는 마당의 펌프, 굴뚝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부엌에 있던 나란한 세개의 아궁이의 정경에 익숙하다. 비록 그 기억의 끝은 나의 초등학교 졸업 무렵까지지만 잊은듯 살다가도 이렇게 그때의 비슷한 정취나 느낌을 받으면 불현듯 나타나 눈에 보는 듯 생생함으로 다시 그려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박수근 화백의 삶과 사랑, 작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신을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에 오롯이 그려낸 과정을 담아낸 일대기이다. 모든 걸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려낸 화가로 생전보다는 사후에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일대기에도 다소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독학으로 본인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는 대목에서 의심에 가까운 의구심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게 가능한가?’
흔히 예술가는 본인의 작품으로 훗날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일생을 온전히 다 바치고 마지막에는 실명까지 했으나 끝끝내 본인의 작품을 만들어간 박수근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에 최선을 다하기에 이렇듯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박수근 화백의 작품마다 담겨있는 특유의 화강암처럼 울퉁불퉁해지는 기법(마티에르 기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무척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고, 상처받고, 극복하고, 또 살아 내고…. 화가가 색을 칠하고, 그 위에 또 덧칠하고, 또 덧칠하여 결국은 캔버스 전체가 울퉁불퉁해지기까지. 그것은 상처 덧바르기가 아닌 우리 주변의 흔하지만 하찮은 것은 아닌 마을 풍경, 사람, 아이들, 일하는 아낙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 가득한 눈빛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사랑은 내게도 전해져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에 있던 흙길, 돌길, 자주 만나던 이웃사람들의 모습이 도란도란 담겨 정감 넘치는 어린 시절로 기억을 되돌려 준다.
사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삶’은 진지함으로 좀 무겁고 어두웠다. 퇴근길에 지금은 지방 국도처럼 활용되는 폐 경부고속도로가 대청호 구간을 지나게 된다. 햇살 좋은 날 이곳을 달리다보면 나는 이 아름다운 대청호를 잠시 ‘빌려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은 내 것이지만 영원히 내 것일 수는 없는…. 그렇기에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좀 더 알차고 보람되게,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소 무겁고 책임감 있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의 사후에는 박수근 화백처럼 길이 길이 남겨질 위대한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만큼은 나를 나답게 살기 위해 행복한 고민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도 있었다. 하지만 ‘빨래터를 읽으며 내가 사는 방식도 우리가 사는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괜찮아. 삶의 방식은 다양한 거야. 너의 삶도 존중해. 네가 만족하는 삶을 살아”라고 빨래터가 말해주는 것 같다. 덕분에 따스한 겨울이 된 것 같다. [충청타임 즈 기사 펌 :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3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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