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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오재학 동문
작성자 홍기엽 등록일 09.11.20 조회수 144

언론속의 기아대책

[조선일보] [사람과 이야기] 아프리카의 갈증 풀어주는 '우물 할머니'
2009/05/04 16:09
 
     

    물 긷느라 학교 못가는 아프리카 아이 보고 충격
    폐품 등 모아 후원금 마련 5개국에 우물 7개 파줘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사는 주부 노국자(여·68)씨는 매일 아침밥을 먹은 뒤 손수레를 끌고 집을 나선다. 점심밥 차릴 시간이 될 때까지 잰걸음으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헌 옷, 신문지, 빈 병을 주워 모은다.

     

    27일 오후 2시쯤, 노씨는 여느 때처럼 단골 고물상에 들러 모아온 폐품을 저울에 올려놓았다. 액정화면에 '27kg'이라는 표시가 떴다. 고물상 주인이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 4장과 100원짜리 동전 4개를 건넸다. 노씨는 활짝 웃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노씨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은퇴한 남편 최해철(76)씨와 단둘이 조촐한 살림을 꾸리는 주부다. 본인도 젊은 시절 강원도 삼척·태백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17년간 근무했다.

     

    노씨가 악착같이 폐품을 모으는 이유는 아프리카 외딴 마을에 우물을 파주기 위해서다. 노씨는 폐품을 모아 팔거나, 화장품 방문판매를 통해 번 돈으로 2006년 2월부터 지난 2월까지 아프리카의 케냐·모잠비크·에티오피아·우간다·짐바브웨의 외딴 마을에 우물 7개를 파 줬다.

     

    노씨는 2005년 10월,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TV에서 보고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누더기를 걸친 10살 꼬마가 울음을 터트리며 "목 말라요. 학교 가고 싶어요" 하는 장면이 노씨를 울렸다. TV 속 꼬마는 자기 몸통보다 큰 물통을 머리에 인 채 "물 길으러 하루 네다섯번씩 6㎞가 넘는 길을 왕복하느라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노씨는 "그 순간 내가 가르치던 탄광촌 아이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시절, 노씨는 탄광촌 아이들이 양동이를 들고 옆 동네까지 물 뜨러 다니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봤다. 탄광촌 냇가엔 시커먼 폐수가 흘렀고, 아이들은 잘 씻지 못해 온몸이 꾀죄죄했다. 가난도 불행을 보탰다.

     

    노씨는 "초등학교 1학년 제자가 며칠간 결석을 해서 찾아갔더니 아이가 방 안에 누운 채 '배가 고파서 학교에 안 갔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꼬마의 아버지는 3교대 하며 막장에 나가고, 어머니는 허드렛일을 했다.

     

    "그 아이는 결국 중학교도 못 마치고 취업했어요. 탄광촌에 있으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그래서 물 때문에 학교 못 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우물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요."

     

    노씨는 TV에 나온 국제 구호단체인 '기아대책' 사무실에 찾아갔고, 이곳에서 아프리카 우물 파기 사업에 대해 들었다. 우물 하나 파는 데 드는 돈은 500만~1000만원.

    노씨는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반응은 떨떠름했다. 남편조차 "국내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데 왜 뜬금없이 아프리카냐"고 했다.

     

    마음이 급해진 노씨는 생전 처음 폐품 모으기에 눈을 돌렸다. 밑천 없이 몸만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오전 동네와 인근 서울시립대 교정을 돌았다. 공사장과 이사 가는 집에 찾아가서 고철과 헌 책을 가져왔다. 작년 겨울에는 폐품이 든 수레를 끌고 빙판길을 오르다 넘어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처음에 "못사는 사람도 아닌데 웬 궁상이냐"며 말렸다. 노씨는 "'빈 병 하나에 물 한 모금, 고철 하나에 물 두 모금'이라고 생각하니 무릎 아픈 줄도 몰랐다"며 "남을 위해 돈 버는 게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노씨는 화장품 방문판매도 했다. 매일 아침 고객들에게 "폼 클렌징 떨어질 때 되지 않았어요?" "영양크림 좋은 거 나왔는데 한번 가져가 볼까요?"하고 전화를 걸었다.

     

    이런 식으로 노씨는 3년간 총 1000여만원을 벌었다. 그 돈을 기아대책에 기부해서, 2006년 2월 아프리카 케냐에 첫 우물을 팠다. 물 부족이 극심해서 렌딜레 부족과 보라나 부족이 상습적으로 '우물 쟁탈전'을 벌이는 지역이었다.

     

    주위에서도 노씨에게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노씨가 다니는 교회에서 청소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월급 60만원 중 매달 5만원을 보태겠다고 나섰다. 이웃 김광휘(여·45·피아노 레슨)씨도 매달 10만원씩 보탠다. 2007년 6월에는 자신을 '학원 강사'라고만 밝힌 한 여성이 노씨 계좌로 250만원을 부쳐왔다.

     

    지난 2월, 노씨는 짐바브웨의 농촌 마을 루시레비에 가서 우물 파는 공사를 지켜보고 돌아왔다. 2007년 우간다 쿠미 마을에 다녀온 뒤 두번째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루시레비는 주민들이 땅에 고인 흙탕물을 식수로 사용해서, 시시때때로 콜레라가 창궐하는 지역이었다. 우물이 완성되던 날 마을 주민 2000여명이 옥수수죽과 양고기를 내놓고 노씨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밤새 잔치를 벌였다.

     

    노씨는 오는 10월 다시 짐바브웨로 간다. 루시레비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쿠나카 병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다. "2월에 갔을 때 병원에 환자가 한 명도 없기에 이유를 물어보니 '물이 없어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노씨는 고물상에서 돈을 받으면 그날그날 은행에 달려가 입금한다. 노씨가 우물 팔 돈을 모으는 통장에는 현재 150여만원이 쌓여 있다. 은행 의자에 앉아 통장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노씨는 핸드백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우간다 쿠미 마을에 사는 어린이 아촘(여·12)이 한국인 구호요원에게 배운 한글로 삐뚤삐뚤 써내려간 편지였다. "이제는 물 뜨러 가지 않아도 돼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편지지 귀퉁이에는 우물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촘이 그려져 있었다.

     

    글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입력 : 2009.04.29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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