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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의 독립운동가
작성자 성복련 등록일 09.06.02 조회수 252
 

2009년 6월의 독립운동가


윤병구의 생애와 독립운동



1. 구한말의 학창시절


윤병구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서울 또는 경기도 양주로 알려져 있고 출생연도는 1877년 또는 1880년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된 데는 구한말 그의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데다 원래의 이름이 윤병구가 아니라 1905년경까지 우병길로 활동해서 잘 드러나지 않은 때문으로 보인다.

윤병구는 구한말에 한성사범학교를 다녔다. 한성사범학교는 갑오정권의 학무대신 박정양이 개혁의 일환으로 1894년 9월 18일 서울 교동의 전 광무국(礦務局) 자리에 세워졌다. 이 ‘사범학교’는 1895년 4월 19일자 「칙령」 제79호로 학교 관제를 개편해 동년 5월 1일 근대적인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로 개정되었다. 학교의 운영은 본과 2년제와 속성과 6개월제로 운영되었고 1899년 4월 25일자 「학부령」 제8호에 의거 본과는 4년제로 확대되었다.

윤병구의 학창시절에 대한 기록은 1898년 5월 28일 오후 2시 서울 동대문안 대한제국 군대 훈련원에서 외국어학교가 주축이 돼 개최한 운동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매일신문, 1898.5.30) 한성사범학교를 대표한 윤병구는 철구를 던져 과녁을 맞추는 ‘방울맞추기’ 운동경기에서 장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성사범학교 교사인 헐버트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 운동회의 사무를 맡아 행사 진행을 도왔다. 윤병구는 이 날 운동회에서 한성사범학교를 대표해서 경기한 마희율이 1899년 4월 제4회로 졸업한 것으로 보면 1897년 5월경 한성사범학교 본과 2년제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4회 한성사범학교의 졸업자 명단에 윤병구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1897년부터 졸업생 수의 증가에 비례해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가 증설되지 못해 교사발령 비율이 현저히 떨어진 데다 교사로서의 길보다 기독교 목회자의 길로 진로를 선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와이로 이민간 직후 윤병구는 하와이감리회의 피어슨 감리사의 영어 통역으로 활동하며 기독교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가 통역을 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고 기독교 목회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한성사범학교의 교사인 헐버트와의 만남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목회자 공부는 1899년 2월 한국 감리교 선교연회의 감리사서리 존스목사의 성경연구 모임인 ‘신학회’에서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학회’의 성경연구는 매년 서울과 평양에서 실시돼 기독교 감리교의 권사와 전도사를 양성하였다. 신학 공부 후 전도사가 된 윤병구는 하와이로 이민가기 전까지 개성의 남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2. 하와이 이민생활과 국권회복운동


윤병구는 1903년 10월 5일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의 부인과 아들은 1904년 3월 30일 하와이로 건너 왔다. 윤병구가 하와이로 건너가게 된 데는 하와이로 이민간 한인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기 위한 기독교 전도자의 사명이 주된 임무였다. 때문에 그가 하와이로 건너가게 된 배경에는 남감리교 선교부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병구는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호놀룰루 미국 감리교의 피어슨 감리사와 협력하여 하와이 군도에 산재하고 있는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피어슨의 후임으로 1904년 가을에 16년 동안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해 왔던 와드만 감리사가 하와이에 도착하자 윤병구는 그의 통역이 돼 함께 선교활동을 추진했다. 이 때 함께 선교활동을 했던 목회자는 현순, 김영식, 홍치범, 문경호, 이경식 등이다.


1) 러일강화회의 외교활동

윤병구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양육하기 위한 전도사 활동 외에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도 병행했다. 1903년 8월 7일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최초의 정치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는데 윤병구는 뒤 늦게 참여한 홍승하와 함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신민회는 한인들의 지식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과 상업의 촉진, 그리고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신민(新民)’이라는 의미 속에는 부패한 대한제국정부의 개혁과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현하겠다는 다분히 진보적인 정치의식이 내포해 있었다. 때문에 혹시 신민회가 대한제국에 반역하는 단체가 아닌가 의심을 받아 하와이 내부에서 반신민회 정서를 만들 정도였다. 윤병구는 신민회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의식을 키워갔다. 신민회가 1905년 4월 해산되자 윤병구는 정원명, 강영소, 김성권, 이만춘, 김규섭 등과 함께 그해 5월 3일 에와농장에서 에와친목회(회장 정원명)를 결성했다. 설립 목적은 항일운동을 위한 일화(日貨)배척과 동족간의 친목과 권익보호였고 1906년 5월 1일부터 친목회보를 발간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윤병구의 첫 번째 대외활동은 러일강화회의에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문제를 호소하기 위한 총대로 선출되면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잇따른 승리로 전세가 우세했으나 막대한 전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더 이상의 전쟁 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7월 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를 중재하겠다고 제의하면서 그 해 8월 포츠머스에 러일강화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는 러일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윤병구에게 그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때 마침 미국 국방장관 윌리암 태프트가 7월 7일 루즈벨트의 영애인 앨리스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들리자 윤병구는 한인대표의 자격으로 그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러한 만남은 하와이 한인들의 의사를 받아들인 와드만 감리사가 하와이 총독대리 애트킨슨을 설득해 이루어졌다. 윤병구는 태프트와의 만남을 통해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이어서 7월 12일자로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 President Roosevelt)”를 작성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15일 하와이의 한인들은 에와 사탕수수 농장에 모여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윤병구를 하와이 한인 7,000명을 대표한 공식 총대로 선출해 전권을 위임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총대로 선출된 윤병구의 여행 경비를 위해 500달러를 모금해 전달했다.

윤병구가 하와이 한인사회를 대표한 총대로 선출될 수 있었던 데는 신민회에서의 왕성한 정치활동과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종교활동, 그리고 통역을 통해 친분을 쌓아 온 와드만과의 개인적인 관계 등이 영향을 미쳤다

하와이 한인을 대표한 총대로 선출된 윤병구는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입학을 위해 준비중이던 이승만에게 타전해 외교활동의 참여를 부탁했다. 윤병구가 이승만을 끌어들인 것은 이승만이 오랜 투옥생활을 감수할 정도로 독립협회시절에 탁월한 활동을 보여주었고, 정치·언론활동의 경험 또한 높다고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1904년 11월 29일 중간 기착지로 호놀룰루에 도착해 그 다음날 떠날 때까지 윤병구는 가장 절친하게 그를 환대해 주었다. 이어서 한인 교회로 인도해 설교를 부탁하는 등 이승만을 하와이 한인들과 와드만 감리사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때마침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뒤 유학차 도미하면서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고 외교활동을 계획 중에 있었는데 두 사람과의 짧은 만남은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과 향후 활동계획을 나누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제요인으로 인해 윤병구는 자신과 동역할 적임자로 이승만을 선택하고 그와의 공동활동을 모색하였던 것 같다. 

윤병구는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하와이를 떠나 미국 동부로 향했다. 윤병구의 활동은 러일강화회의의 참관인으로 활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주목적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미리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한인들의 희망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7월 31일 워싱턴DC에 도착한 윤병구는 이승만을 만났고 두 사람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고 거사진행의 방안을 상의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8월 4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을 찾아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30분간의 짧은 접견시간동안 윤병구와 이승만은 방문목적을 설명하고 가지고 갔던 청원서를 직접 제출하였다. 그런데 루즈벨트는 내용을 읽어본 후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 달라 하고는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루즈벨트는 이미 두 사람이 당도하기 전에 일본에 보낸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佳太郞)와의 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하는 대신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행동에 미국이 동의한다는 의사를 7월 31일자 전보로 동경에 보낸 바 있었다. 즉 윤병구와 이승만이 당도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속방화를 묵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태프트의 소개장이나 루즈벨트의 접견은 모두 형식적인 겉치레로써 두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이런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윤병구와 이승만은 1882년 5월에 조인된 한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아무 효용이 없었다. 더구나 워싱턴의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의 지령에 따라 청원서 전달을 거부함으로써 두 사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동부에서 외교활동을 마친 윤병구는 1905년 11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공립협회에 입회해 정식 회원이 되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주미일본공사 고평(高坪)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의 신문기자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이다. 이번 을사조약은 한국정부가 복종하여 평화스럽게 된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이에 반발한 윤병구는 하와이로 떠나기 하루 전인 12월 15일 샌프란시스코의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을사조약은 일본의 창날 끝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사실상 한국을 합병하려는 계책이라고 반박했다. 

1906년 5월 윤병구는 호놀룰루에서 시사신보(時事新報)를 발간했다.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한 외교활동을 펼친 뒤 국권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깨달은 그는 한인들의 안목을 계발하고 지식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이 신문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의 신문 발간은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재정후원이 원활하지 못해 그 해 7월 정간하였고 다시 10월에 재간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2) 유럽순방 구국외교활동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8월 1일 뉴욕에 도착한 뒤 윤병구가 한국특사의 활동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분사한 이준과 함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준의 갑작스런 죽음과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구미열강을 상대로 한 구국외교로 방향을 바꾸면서 미국에 들어왔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국대통령을 접견해 한국 사정을 설명해 동정을 얻고 일본의 만행과 야욕을 폭로하는 선전외교활동을 계획했다. 미국대통령과의 접견은 미국 행정부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으나 후자의 선전활동은 미국의 언론 및 단체를 상대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8월 말경 두 사람은 유럽 열강을 상대로 구국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뉴욕을 떠났는데 이 때 윤병구는 로아녹 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헌주와 함께 한국특사들과 합류했다. 윤병구와 송헌주가 한국특사와 합류할 수 있었던 데는 덴버에서 활동 중인 박용만의 적극적인 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특사와 함께 추진한 윤병구의 유럽순방외교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9월 3일 헤이그에서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윤병구는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국민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다룬 주제 연설을 했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민을 상대로 무지한 강탈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평화회의보(CourrierdelaConference), 1907. 9. 6) 그의 주제 연설은 이후 장내에서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는 런던에 가서 영국의 주요 사회단체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상은 영국의 유력 신문에 보도되어 블라디보스톡에까지 알려졌는데 이 지역에서 발행하던 해조신문은 1908년 3월 19일자와 20일자에 윤병구의 연설내용과 활동상을 자세히 소개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치하하였다.

윤병구는 이상설, 이위종, 송헌주와 함께 장기간의 유럽 순방외교를 마치고 1908년 3월 초 뉴욕에 돌아왔다. 러일강화회의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두 차례나 막중한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한 윤병구는 이후 미주한인사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3)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 참가활동

윤병구가 유럽순방외교를 마치고 미국 뉴욕에 돌아왔을 때 미주한인사회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는 1908년 1월 박용만이 자주독립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안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추진 중에 있었고, 두 번째는 같은 해 3월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일로 전 미주한인들이 일치단결해 사건 해결을 변호할 때였다. 윤병구는 친분있는 박용만의 제안에 호응해 뉴욕에 있던 김헌식과 함께 7월 9일 덴버에 당도해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했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는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덴버의 그레이스감리교회에서 박용만, 이관수, 이승만, 윤병구 등 36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개최되었다. 대회 운영은 회장 이승만, 국문서기 박용만, 영문서기 윤병구가 맡았다. 이로 볼 때 윤병구는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이번 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윤병구는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는 해외 한인들의 결속 방안과 민족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고 당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출판사업, 한인 통신소의 설치, 군사학교의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가 끝난 후 윤병구는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고 덴버에 잠시 정착했다. 박용만이 대회를 마치고 1908년 9월 네브라스카주립대학교의 입학을 위해 덴버를 떠나면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노동 주선소 겸 여관을 윤병구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는 덴버에서 얼마동안 머물다 다시 미국 동부로 건너갔고 1909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신한민보 1909. 6. 30, 「환영윤씨」) 이 때 1909년 11월 상항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던 양주삼 전도사가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 동부로 떠나게 되자 12월부터 그의 후임자가 되어 상항한인교회의 목회를 담당했다. 


  4) 상항한인교회에서의 합방반대운동 

윤병구는 상항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과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병행했다. 먼저 그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발간하는 '대도'의 편집을 전담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증진과 구국활동을 추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망국의 위기를 겪는 것은 내부 계급의 분열과 부패가 원인이었음을 진단하고 기독교의 복음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대도 제1권 10호(1909.10), “종교와 사회의 진화”; 제2권 1호(1909.12) “박애의 효과”) 그리고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되는 정보를 주기 위해 1910년 1월부터 ‘농학’을 번역하여 '대도'에 실었는데 한인사회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다음으로 윤병구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합방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강제병합 시도에 대해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6월 25일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가 연합해 작성한 합방반대를 위한 「근고문」을 한인사회에 배포했다. 그러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1910년 7월 4일 합방반대를 위한 특별회를 개최했는데 윤병구는 합방반대회의 임시의장으로 본회를 주도하며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 때 애국동맹단을 결성했는데 그는 의장 최정익, 서기 이원익, 재무원 황사용, 번역원 이대위, 회계원 허승원·조성학 등과 함께 외교원에 피선되어 합방반대를 위한 취지서와 청원서를 대한제국의 황제와 일본왕, 그리고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9개국의 정부에 발송했다. 이런 북미의 움직임과 동시에 하와이지방총회도 7월 5일 공동회를 갖고 대동공진단을 조직해 대대적인 합방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윤병구의 합방반대운동은 자신이 목회하는 상항한인교회의 '대도' 를 통해서도활발히 전개되었다.“불망고국(不忘故國)”(대도제2월5호, 1910.4)이라는 글에서 합방에 앞장서고 있는 일진회와 친일 정탐군을 비판하였고, “오호 한국이 이미 자빠졌으나 반드시 새로 일어나리라”(대도 제2권 9호, 1910.9)에서 독립을 위한 당면 과제로 교육과 실업의 발달, 언론과 법치를 다룰 국회의 건설을 주장했다. 또한 “애가” (대도 제2권 10호, 1910.10)를 지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자고 노래하며 상항한인교회 교인들과 함께 합방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국권회복의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윤병구는 어린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1910년 11월 상한한인교회 안에 처음으로 대한소학교를 설립했다. 교사는 윤병구를 비롯해 이원익, 최정익, 이두형, 마영준 등이었고 공부시간은 미국 학교에서 돌아온 후 매일 1시간씩으로 했다.

목회자로서 기독교 신앙의 증진과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윤병구는 1911년 2월 1일 이대위에게 목회를 넘겨주고 상항한인교회를 사임했다. 사임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은데 농장 경영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가족과 함께 오레곤주의 트라웃데일(Troutdale)로 이사했다. 그런데 그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3. 윤병구의 독립운동


  1)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서의 대외활동

윤병구는 1912년 11월 8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박상하와 함께 하와이지방총회를 대표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윤병구는 또다른 중앙총회장 후보자인 안창호를 제치고 제2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지금까지 대한인국민회는 해외한인의 통일기관이자 ‘가 정부’로 되기 위해 1911년 3월 중앙총회를 설립해 초대 중앙총회장에 최정익과 부회장 한재명을 선출했으나 이하의 조직이 없는 이름뿐인 중앙총회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개최한 제1회 대표원 의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상과 역할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 일의 적임자로 윤병구를 중앙총회장에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서 윤병구의 활동은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다. 헌장의 수정으로 위상은 강화되었지만 중앙총회가 독자적으로 외교사무를 추진할 예산이나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회 대표회의 의결로 두 지방총회의 기관보를 중앙총회에 양여하기로 했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대한인국민회의 주요 사업은 여전히 북미지방총회나 하와이지방총회가 중심이 되었고 중앙총회가 나설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윤병구는 각 지방을 순방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노력을 했다. 가는 곳마다 한인 청중들은 그의 능숙한 영어솜씨와 유력한 웅변을 높이 평가하였다.

윤병구는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농장일도 병행하였는데 1914년 1월 농업상의 손실을 입어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되자 더 이상 회무를 집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중앙총회장 사면을 청원해 그해 3월 의원면직했다. 

중앙총회장에 사면한 뒤 그는 워싱턴주의 섬너(Sumner)와 위니치(Wenatchee) 등으로 거주지로 옮겼다. 특별히 위니치에서 그는 한인교육회를 설립해 한인 청년들의 학업증진을 후원하는 일을 했다. 그가 한인교육회를 설립한 데는 경제와 실업방면에서 독립해야 정치상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한인학생들에게 농·공 분야의 실용 학문을 장려하기 위함이었다.

3·1운동 소식이 미주한인사회에 전파되자 윤병구는 또 다시 대외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먼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현순으로부터 3·1운동 소식을 전달 받은 3월 9일 저녁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윤병구와 정인과를 교섭위원으로 선임해 미국 내 종교계와 사회단체에 한국독립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에 대해 윤병구는 “참으로 진정으로 대한독립선언의 소식을 기뻐합니다. 나도 이러한 국사 대사에 무엇이든지 한 몫 할 것을 지휘하시오”라 응답하며 1,500 에이커의 땅에 7,000여 달러를 투입한 자신의 농장사업을 포기하고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각 도시를 순회하며 본격적 활동을 펼쳤다. 또한 중앙총회는이승만·서재필이필라델피아에서주최한 ‘제1차 한인회의’(1919.4.14∼16)에 참석할 위원을 선정해 미국 동부로 파견했는데 윤병구는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국민에게 보낼 메시지와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담은 청원서 작성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돼 활동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전개하던 윤병구는 안창호의 상해행 이후 공석 중이던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총회장 후보이자 북미총회장을 역임한 이대위를 제치고 당선되었는데 대한인국민회에서 중앙총회장을 두 번씩 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앙총회가 할 수 있는 권한이나 예산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특별히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가 시행하고 있던 애국금 모금을 중지하고 공채금 모집을 요구하면서 발생한 애국금-공채금 논쟁과 구미위원부의 설립으로 나타난 대외활동의 위축 등으로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이 크게 추락하면서 중앙총회장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윤병구는 중앙총회의 역할을 강화하여 명실상부한 중앙기관의 위상을 수립하기 위해 1919년 12월 22일부터 30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 국민대회를 소집했다. 하와이지방총회를 제외한 각 지방대표원 27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국민대회는 21개조의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새로 임원진을 확정하는 등 중앙총회를 대한인국민회의 명실상부한 중앙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1920년 1월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일어난 심각한 내분을 해결하기 위해 윤병구가 적극 노력했으나 오히려 양측간을 더욱 분열시키게 되자 중앙총회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더구나 국민대회 이후 계획한 예산안도 원안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런 연유로 노백린과 김종림 등이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자 윤병구는 중앙총회 차원에서 지원을 약속하였지만 열악한 재정사정으로 전혀 지원할 수 없었다.

윤병구는 운영경비도 없고 자체사업은 물론 사무실 운영도 어려워지자 1920년 7월 1일 「중앙총회공고」를 발표하고 중앙총회의 사무실을 폐쇄하였다. 3·1운동으로 고조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미주한인사회의 복잡한 기류로 냉각되면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사무실 폐쇄가 곧바로 중앙총회장의 사임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윤병구는 더 이상 중앙총회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1921년 1월 15일 김종림, 홍종만 등과 함께 유니온식산회사를 설립했다. 부동산 매매와 중개를 주로 하는 이 회사는 윤병구가 1922년 3월 29일 사업상의 이유로 리들리로 이거한 것으로 보면 그 운영이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2) 임정지원을 위한 시사연구회의 결성

리들리로 이사한 윤병구는 250에이커의 땅에 수박농사를 하면서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지방회에서 활동했다. 중앙총회장의 직책으로 연설을 하거나 송헌주와 함께 지방외교원으로 활동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고 한편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해 국민대표회를 준비하려 하자 윤병구는 1921년 12월 17일 42명의 한인들이 다뉴바 한인교회에 모인 가운데 시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조직 목적은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반대하고 이승만과 임정에 대한 지지운동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윤병구를 비롯해 서기 최영기, 간사 홍치범· 장기영·김정진·안석중·윤병희·김탁으로 이루어졌다. 시사연구회를 통해 임정대통령의 위상이 크게 흔들려 위기에 처한 이승만과 나약한 임정을 지원한 것은 윤병구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정도가 얼마나 컸었는지 잘 보여 준다.

한편 윤병구는 남감리교 부속교회 순행목사인 임정구와 함께 같은 지역에 사는 윤병희·이범녕·안석중 등과 함께 리들리 한인교회를 설립하고 교회 일도 병행했다. 그의 교회 일을 전임 목회자로서의 활동으로 간주할 수 없으나 그동안 기독교 목회자로 살아 온 것과 상항한인교회에서의 목회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뉴욕한인교회에서의 독립운동

1929년 9월경 윤병구는 뉴욕한인교회의 청빙을 받아 리들리를 떠나 뉴욕으로 갔다. 상항한인교회의 목회 경력과 리들리 한인교회의 목회 활동, 중앙총회장으로서의 활동 경력 등이 그를 뉴욕한인교회의 적임자로 청빙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뉴욕한인교회의 제3대 목회자로서 1936년 사임할 때까지 교회의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까지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는 부임 직후인 9월 24일, 한인유학생을 돕기 위한 재정모집을 추진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서재필에게 보냈다. 당시 뉴욕한인교회의 주요 구성원은 콜럼비아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유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돕기 위한 재정모금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1931년 12월 13일,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하던 콜럼비아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사회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연구자료를 제공하기위한 ‘재미조선문화회’(초대회장 윤홍섭)가 설립되었다. 윤병구는 이사로 참여해 창립을 돕고 회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한편 일본이 만주침략을 단행하며 국제세계에 무법행동을 보이자 이를 규탄하기 위해 1931년 11월 25일 뉴욕한인들이 연합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한인의 성명(The Korean Manifesto against the Japanese in Manchuria)」이라는 영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중심이 바로 윤병구가 담임하고 있는 뉴욕한인교회였다. 1932년 2월 19일 국민회, 교민단, 동지회, 흥사단의 이름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을 항의하는 결의문을 발표해 미국 후버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 또한 참가한 단체의 대표자들이 모두 뉴욕한인교회 소속의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윤병구는 뉴욕한인교회에 부임한 이후 기독교 신앙을 위한 목회사역뿐만 아니라 한인유학생을 지원하고 한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노력 등을 병행하며 활동했다. 

뉴욕한인교회에서 윤병구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1929년 12월 21일 뉴욕증시의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한인들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는데 그러한 영향이 교회 운영에도 그대로 미쳤다. 목회자의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1932년 큰 아들 조(Joe)가, 1933년에는 큰 딸 사라(Sarah)가 잇달아 죽으면서 힘든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는 뉴저지에 가서 과수농장 일도 병행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자연 교회의 사역도 등한히 하게 되어 1936년 스스로 사임하였다. 그런데 농장일도 여의치 않아 힘든 생활은 계속되었다. 마침 로스앤젤레스의 한 조선소에 일자리를 얻게 되자 1939년 말경(또는 1940년 초경) 전 가족을 이끌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4) 미국방 후원활동과 임정대표단에서의 활동

윤병구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조선소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나 오래 한 것 같지 않다. 그는 1946년 4월 리들리 한인장로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아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도 했으나 1949년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로 로스앤젤레스와 리들리를 왕래하면서 목사로서 활동했다.

미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독립에 대한 희망이 더욱 밝아 오자 미주한인들은 미주한인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미국 국방공채를 매입하거나 한인경위대를 설립해 미국 국방을 후원하는 일을 추진했다. 이것은 미일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하루빨리 앞당길 수 있다는 미주한인들의 절박한 희망이기도 했다. 이런 독립의 염원을 갖고 미주한인사회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미군에 자원 입대하기 시작했다. 1944년 12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북미 한인청년의 경우 195명이 입대하였다.

윤병구는 미일전쟁 이후 한인청년들의 미군 입대가 증가하고 또 자신의 아들 프랭크 윤도 194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자 1943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결성했다. 그가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설립한 것은 미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을 돕고 이들 가운데 특별히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함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 국방을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참전 자녀의 부모들과 그 친족들을 결속시켜 참전 한인청년들의 안전과 미군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재미한인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드러내려 하였고 미국 정부로부터 임정승인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영문잡지 The Star Exponent를 매월 손수 편집, 제작하여 미국의 정치·종교·지식계층에 배포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널리 알렸고 한인 2세 청년들에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했다. 이처럼 그의 한족출정군인친족회의 설립은 전쟁 중인 미국사회에 한미간의 가교를 잇는 뜻 깊은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어 가자 미국·영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전후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기구 창설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5년 4월 25일 50여개의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회의(1945.4.25∼6.26)를 개최하였다. 전쟁 종결을 앞두고 열린 대규모 국제대회를 대비해 중경의 임시정부와 미주한인들은 대회 참가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은 중경 임정의 훈령에 의지하여 7명의 임정대표단을 조직했는데 윤병구를 임정대표단의 교제부장과 재정검사원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의 한인들도 스스로 해외한족대표단을 조직하였다. 샌프란시스코회의를 둘러싸고 한인 대표가 둘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임정대표단과 해외한족대표단은 합동을 추진하지만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유포 등의 문제로 인해 공동활동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때문에 임정대표단이나 해외한족대표단 모두 대외선전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없었다.

임정대표단에 합류한 윤병구의 활동영역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정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을 정리하면서, ‘비록 참가권을 얻지 못했으나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우리 한인의 형편을 널리 선전한 것만은 성공한 것으로 본다’고 그 결과를 자평했다.(북미시보 1945.7.15) 그리고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유포에 대해 한인들끼리 비방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라 하여 이승만을 적극 변호하였고 향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윤병구가 광복직전 임정대표단에 합류해 이승만을 도와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 일은 필생의 숙원인 한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마지막 헌신이었다.


4. 귀국 후 한국정부에서의 대외활동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이 된 후 윤병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지회북미총회의 선전부장으로서 동지회의 발전과 귀국한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후원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의 통치가 종결되고 마침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윤병구를 즉각 한국에 초대했다.

1949년 3월 14일 윤병구는 고국을 떠난 지 4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종군목사로서 조용히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이승만은 윤병구를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이라는 중책에 임명해 자신의 정치활동을 돕도록 했다. 이승만은 윤병구로 하여금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중·남미의 각국을 비롯해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유엔의 48개국 우방국을 방문해 감사하는 친선외교를 부탁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 외에 윤병구는 한미 간에 새로운 협약이 필요함을 깨닫고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밤새도록 이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다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진 뒤 그 날로 세상을 떠났다.

윤병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국정부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는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러한 애도는 일생을 한국의 기독교 복음화와 한국의 국권회복, 그리고 독립을 위해 헌신해 왔던 윤병구가 신생 대한민국정부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역량을 다 바친 삶에 대한 온 국민의 슬픔이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해 그의 공적을 높이 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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