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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어머니와 화장품/정목일
작성자 황서연 등록일 10.08.19 조회수 18
팔순 어머니와 화장품 / 정목일


'어버이 날'에 남들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 드리는 것을 보고, '그까짓 꽃 하나 달아 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생각하곤 했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온 나는 남들이 일년마다 의례적으로 꽃을 달아 드리는 행위를 남사스럽게 여겨 내 손으로 카네이션 꽃을 달아 드리지 못했다. 아들과 딸들을 시켜 할머니에게 꽃을 달아 드리도록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버이의 날이 다가오면, 이제 카네이션 하나 달아 드릴 분이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이 허망하고 눈물겨울 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효성을 다하라 하였건만, 그러치 못하고 돌아가시고 나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버이날에 꽃 하나를 달아 드리는 이 형식적이고 평범한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가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억울하게 생각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2년 전 어느 토요일, 일찍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노모(老母)와 만났다.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노인당으로 발걸음을 하시는 모양이셨는데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셨다. 집 밖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조우한 것은 드문 일이기도 했다. 나는 84세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갔다.

대여섯 살 적 어느 화창한 봄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꽃구경을 간 기억이 떠올랐다. 팔랑팔랑 춤추는 나비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나들이를 할 때, 향긋한 꽃내음이 어머니의 화장 냄새와 함께 풍겨 왔다. 아, 세월이 흘러 대여섯 살이던 아들은 어느새 50대가 되었고, 아름다우시던 어머니는 주름진 팔순 할머니가 되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 대여섯 살의 아들이 되어 휘파람을 날리며 깡총깡총 뛰면서 나들이 가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어머니께서도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나를 보며 웃고 계셨다.

"어디로 가느냐?"
어머니는 의아롭다는 듯이 물었다.
"어머니! 오늘, 갖고 싶은 걸 다 말씀하셔요. 무엇이든 사 드리겠어요."

50대가 되도록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기에 바쁘다는 핑계, 내 일에만 빠져, 어머니에 대해 관심과 정성을 쏟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처음으로 단둘이서 백화점에 오게 된 것에 기분이 고조되었다. 대여섯 살 적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봄나들이를 가던 기분이었다.

"어머니, 뭘 사 드릴까요? 비싼 것도 괜찮아요."
나는 어머니의 어떤 요구라도 응할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계면쩍게 웃으시기만 했다. 어머니께 선물을 사 드릴 수 있는 기회도 과연 몇 번이나 될 것인가.
어머니는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띠시며 말했다.

"얘야, 화장품을 사고 싶구나."
팔순 노모의 입에서 '화장품'이란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무리 노인이라 할지라도 여인임이 분명했다. 어머니께 한번도 화장품을 사 드리지 못한 일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옷가지나 생활용품을 사 드렸지만, 어머니와 연관하여 '화장품'이란 낱말조차 떠올려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도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싶어하는 한 여인임을 왜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까.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픈 본성을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여인이라는 걸 늦게야 알게 된 것일까. 어머니에 대한 무관심이 지나쳤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47세에 홀몸이 되신 후 4남매를 바라보며 일생을 보내셨다. 그 동안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셨을까. 궁핍한 살림살이 속에서 4남매의 치다꺼리에 온 관심을 기울이시느라 어머니께선 화장하는 모습조차 자식들에게 보인 일이 없었다.

"노인이 쓸 가장 좋은 화장품을 주세요!"
어렸을 적에 보았던 젊고 어여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어쩌면 장수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휘파람이 솔솔 나올 듯했다. 여인은 늙는다고 하여도 미에 대한 갈망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간직하고픈 꿈일 것이다.

어버이날이 돌아온다 해도, 하늘 아래 한 송이 꽃을 달아 드리고 화장품을 사 드릴 분이 계시지 않는 것이 한탄스러워 먼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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