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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교육> 11월 2주 - 학생의 날
작성자 견형규 등록일 14.11.05 조회수 153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여 1945년 조선학생대회가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하여 기념식을 가진데 유래 1953년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 후 1973년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많은 학생들의 탄압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1984년 다시 부활되었고 2006년에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변경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후꾸다 등의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 박기욱, 이금자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센징'이라고 놀리는 것을 보고 박기욱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의 박준채가 후꾸다를 꾸짖었다. 너무도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순사 모리다는 일방적으로 박준채만을 구타했고 광주일보는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편파보도를 했다.

이에 조선의 개천절이면서 일제의 명치절이었던 11월 3일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편파보도를 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했으며 일본인 학교였던 광주중학교 학생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민족감정에 의한 이러한 자생적인 싸움을 당시 학생 소모임인 독서회가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국적이고 장기적인 최대의 항일 학생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항일투쟁에는 54개 소학교와 136개 중학교,4개의 전문학교가 나섰으며 참가인원은 5만4천여명, 구속자 1642명, 무기정학 2330명, 퇴학처분 582명 등 대탄압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식민지 교육철폐'를 부르짖으며 뜨겁게 싸웠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에 이어 학생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선포한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고 이 땅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기 위해 전국의 학생들이 일치단결하여 피흘려 싸운 것이다.

광주 학생 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와 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청년학생의 의기와 민족애를 치열하게 보여줌으로써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하였고,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광복 후에도 학생은 4.19혁명으로 민족의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온몸을 던져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는 등 민족의 횃불 역할을 해왔다. 사회와 역사의 떳떳한 주인으로 한걸음 내딛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학생의 날'의 기원이 되고 있는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은 우리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이하여 옛 선배들의 자주정신, 독립정신, 그 민족적 사명감을 되새기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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