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부설미호중학교 로고이미지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충북 출신 6월의 독립운동가 <석창문>〔6월의 교양-2〕
작성자 박용구 등록일 12.06.13 조회수 215

석창문 선생은 보은 속리산 출신으로 키가 작으나 매우 용맹한 성품으로 한봉수의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 받다 순국한 의병이다.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내북초는 우리고장의 독립운동 및 국가수호 관련 현충 시설인 이승칠지사공적비(충북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와 결연을 맺고 있다.
석창문 선생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속리산중에 의진이 형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맹 활약해 한봉수 의병장의 참모장이 됐다. 1908년 5월 의병장 한봉수·김규환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우의 산기슭에 매복,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병을 저격해 사살하고 접전 중 나머지 일인이 퇴각하자 우편물과 현금 2000여 원을 탈취해 군자금에 썼다.
그해 봄에 석창문이 적정을 탐색하기 위하여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 명에게 창졸지간에 포위되었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틈을 보아 도주하였으나 적의 추격을 받아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체포당하였다. 적이 그를 심문하여 의진의 근거지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석창문은 “이미 사로잡혔으니 내가 죽을지언정 남을 끌어들이겠느냐” 하며 혀를 깨물며 자백하지 않았다. 적이 보은군으로 그를 끌어내려서 살해하였다. 시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온 집안이 놀라고 슬퍼하였으나, 그의 처는 태연히 예로써 장례를 지내었다. 그 사흘 후 부인마저 20세의 나이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전글 6.15남북공동선언일〔6월 계기교육-3〕
다음글 6월의 독립운동가 <김법린>〔6월의 교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