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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김법린>〔6월의 교양-1〕
작성자 박용구 등록일 12.06.13 조회수 220

국가보훈처에서 3ㆍ1운동 때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법린(1899.8.23~1964.3.14)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해 이듬해 범어사로 승적을 옮겨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ㆍ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됐다.

1917년 범어사의 인재양성 운동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했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했으며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밀령에 의해 독립을 위한 사료의 집성과 전달을 주도하고,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의용승군을 조직하고 조직체 가동을 위해 국내를 오가며 기밀부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져 오자 1920년 4월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재개했으며 1923년 11월 프랑스 파리대학교(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같은 해 12월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32년 3월 귀국 후 교육을 통한 민족자각에 힘쓰던 선생은 1938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됐다. 범어사로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1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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