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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울, 내일의 길잡이>5-3 김서진
작성자 김서진 등록일 15.12.01 조회수 64

책제목: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다.

지은이: 금현진

출판사: 사회평론


 우리나라는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중 오늘은 조선후기, 그중에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는 700여 쳑의 배가 몰려왔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무너뜨린 왜군은 평양까지 곧바로 올라왔는데, 그 도중에 경복궁이 타 버렸다고 한다. 백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피난을 간 선조를 보니 당시 백성들이 배신감을 정말 많이 느꼈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조선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다에서나마 큰 승리를 거둔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일본에 앞선 문물을 전해 주었는데 우리나라를 수시로 공격하는 일본을 보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두번째로 일어난 전쟁은 바로 병자호란이다. 그 시작은 이랬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에 공격을 당하자 광해군은 1만 군사를 보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통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게는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한 것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북쪽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과 명나라가 대치하던 중 광해군이 어느 한 편을 들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아주 위험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왕이 되었고, 인조가 명나라 편을 듬으로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후금)의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6일만에 한양에 들이닥쳤는데,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탓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만약 인조가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했더라면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을 텐데 말이다. 인조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항상 명나라를 섬기고 떠받들던 우리나라였는데, 갑자기 배신을 하려니 힘들었을 법도 하다. 어쨌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1만 4천 군사와 50일 치 식량으로는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중 특히 병자호란은 우리나라로서는 창피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역사라고 기피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역사를 통해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자 내일의 길잡이이다. 즉, 역사는 오늘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고 내일을 더 보람있게 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역사를 잘 익혀 앞으로도 창피한 역사가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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