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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작성자 김은정 등록일 12.08.30 조회수 161

  [ 독립운동가 김동수 ] 2012년 9월의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

 

[ 독립운동가 김동수 ] 2012년 9월의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공식 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광복군에 소속되어있었던 분들은 참 많은데요,

9월의 독립운동가이신 김동수 선생도 이 광복군에서 활약한 분입니다.

 

 9월, 한국 독립군의 창설일을 맞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신 김동수 선생에 대해

오늘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건 어떠세요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담다

 

 

▶ 생전의 김동수 선생

 [이미지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동수 선생은 1916년 12월 6일 인천에서 김우제의 외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선생의 가문은 강화의 유명한 양반가문으로 기독교를 신앙하던 집안의 분위기에 따라

김동수 선생은 어릴 적부터 민족의식과 신앙심을 키우며 자라났습니다.

 

1923년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부친이 파송되자

김동수 선생은 8세의 나이로 이를 따라 가게 되었고

민족교육의 상징이던 인성학교를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화랑사 등의 각종 소년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이후 공시중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1월의 제 1차 상해사변을 겪고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학생 시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34년,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감동수 선생은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습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가 중국측의 지원으로 독립전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중국군 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연마하고

1935년에는 다른 한인 훈련생들과 김구가 조직한 특무대에 들어가 반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낙양분교 한일특별반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훈련에 대하여 알에된 일제당국은 중국에 엄중하게 항의하며 폐교를 강요하였고,

그리하여 1935년 4월 1기의 졸업생을 배출한 채로 낙양분교 한일특별반은 폐교를 하고 맙니다.

 

김동수 선생과 함께 졸업한 군관들은 관내 지역 독립운동의 기관요원으로 성장했습니다.

만주로 파견되어 적후공작을 전개하거나 중국군 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선생은 후자인 중국군 에 들어가는 길을 택하여 중국 육군 제 25사단 견습사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동수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대가족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떠나는 길에

김구 등의 요인들과 가족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피난 중, 임시정부가 이동으로 인해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하지 못하자

젊은 한인들은 하루 빨리 전쟁터로 나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김동수 선생은 1939년 10월 중경에서 나월환 , 이하유 , 박기성 , 이재현 등과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등, 반일운동을 계속 해 나아갔습니다.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다

 

김동수 선생이 활약하던 전지공작대는 1940년 말에는 대원이 백 여명으로 늘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는 정부를 재정비 하면서 군무부와 참모부를 증설하고

화북지역에 이주해 온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전개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중국측의 양해와 재정지원 약속을 확보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교섭을 한 끝에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임시정부의 국군임을 밝혔습니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산하에 제 1,2,3,5 지대등 4개 지대가 있었는데요,

그 중 제5지대는 김동수 선생이 소속되어있던 전지공작대를 기본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실제로 광복군이 창설되고 군사특파단이 총사령부와 합류하여 1,2,3지대가 편성된 것처럼

전기공작대도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고 1941년 1월 1일에 편입되어 제 5지대로 성립된 것이었습니다.

깅동수 선생은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대장이 되어 서안을 중심으로 장병들을 훈련시키며

초모 , 선전, 정보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42년 3월 1일, 광복군에게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대구성원간의 갈등끝에 지대장 나월환 이 대원들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제 5지대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살해혐의로 대원들 20여명이 중국군 당국에 체포되어

박동운등은 사형선고를 받고 본의아니게 연루되었던 김동수 선생마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석방되어

곧바로 다시 광복군 군사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며 광복군이 개편됨에 따라 김동수 선생은 제 2지대로 편입되어

중국의 중앙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반을 특설하고 이 곳에서 신입 대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토교대 를 중경에 설치하고 김동수 선생을 제3대 대장으로 역임하였습니다.

토교대 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요원의 호위, 광복군의 간부요원 교육과 양성,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 활동이 주로

부대가 늘어났다기보다는 일종의 보충대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이러한 토교대 활동 1945년 8월 15일이 다가왔고, 이들은 읿본의 패망소식을 접했습니다.

김동수 선생은 조국이 광복되었으나 바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상해지당부 특파원 등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조선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 할 수 있도록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안전한 귀국을 주선하였고 선생 자신도 1948년 6월에 귀국하였습니다.

 

 

상훈과 추모

1993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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